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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청춘
잘한다, 청춘 2011/12/30

"나? 이제 많이 길들여였지." 대학에 갓 입학해서 만났던 친구를 서른 둘에 다시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에 길들여 졌냐고요? 20대의 분노, 욕망, 신념과 맞서던 바깥 세상으로부터 길들여진겁니다. 어쩌면 그때..

서점 명가 로드뷰❹ 대구 물레책방

'간디의 물레'처럼 이야기가 줄줄 감겨 나올 것만 같은 대구 수성경찰서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서 50미터쯤 올라갔을까. 작은 네모 간판이 보인다. 연둣빛 바탕에 쓰인 글씨 ‘물레책방’(이하 ‘물레’). 재밌는 이야기들이..

디지털 in, 디지털人-'나모이북에디터' 박광섭 대리

나모 인터랙티브(이하 ‘나모’)가 지난 달 ‘나모이북에디터’(Namo e-book Editor, 이하 ‘이북에디터’)를 내놓았다. 이북 에디터는 1인 전자 출판 시대를 맞아 기존의 출판용 데이터나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한 파일..

서점 명가 로드뷰❸ 대전 계룡문고

이야기가 넘치고 빛그림이 흐르는 일흔 다섯 번째 ‘서점 나들이’를 가다 막 어린티를 벗은 여자 아이 셋이 ‘왜요 아저씨’를 향해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넨다. 재잘재잘 말을 붙여오는 아이들에게 이 대표는 이내 반갑게 고개를 끄..

3월 eBook new Book
3월 eBook new Book 2011/03/09

<멀티북> 아기돼지 삼형제 이지넷 만듦 이지넷에서 개발한 Toddler eBook 시리즈로 전문 성우가 읽어주는 앱북이다. 동화를 읽어 주는 기능 뿐 아니라 부모님이나 아이가 직접 동화를 녹음 하여 들을 수 있으며, 동화 캐릭..

2월 eBook new Book
2월 eBook new Book 2011/03/09

<이북> 발리홀릭, 신들의 섬에서 노닐다 임진숙 지음 | eStory 펴냄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저자가 발리의 매력을 잊지 못해 다시 ‘신들의 섬’을 찾는다. 발리의 예술촌 우붓에서 민박하며 현지인들과 섞여 발리의 속살을 체험..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Q&A로 푸는 ‘전자책’ ②

서울 서대문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에서 진행한 《홍기빈, 자본주의를 말하다》 미니 강연회 참석자들의 물음표 선택 ⓠ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알기 쉬운 ‘전자책 사용 설명서’를 종합하고자 마련한 ‘독자참여형 전자책 Q&..

지면으로 만나는 ‘전자책 세미나’②

한국전자출판협회 주최 ‘2011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 제안 설명회 출판사와 개발사를 이어주는 ‘애플리케이션’ 다리 한국전자출판협회(회장 최태경)가 중소출판사와 중소개발업체의 협업을 돕고자 제안 설명회를 마련했다. 지난 1월..


 "나? 이제 많이 길들여였지." 대학에 갓 입학해서 만났던 친구를 서른 둘에 다시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에 길들여 졌냐고요? 20대의 분노, 욕망, 신념과 맞서던 바깥 세상으로부터 길들여진겁니다. 어쩌면 그때는 '바깥 세상'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깨만 스쳐도 17대 1로 싸울 수 있는 분노는 바깥 세상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된 거니까요.

대체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도, 내가 휘두르는 것이 정의인지 칼인지도 몰랐던 20대. <잘한다, 청춘>을 보며 안도합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았을 것 같은 20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갔음을요. 그리고 또 한 번 안도합니다.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 무엇과 화해해야 하는지, 분노와 욕망, 신념을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 지 아는 20대를 만나서요. (사실 저자는 20대라고 하기엔 너무 늙었다는 게 아쉽습니다.)


그 젊음을 마냥 찬양하고 싶은 건 그가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책을 쓰고 세상에 내놓은 이순간에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향해 몸을 돌려놓고, 고민하고 괴로워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가장 무서운 20대지요. 제법 순하게 길들여 졌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30대가 보기에는 참 무섭습니다. 

우선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글밥들을 나열해보면 참 겁이 없습니다. 중앙과 지방, 정치의식, 쇼핑중독, 사랑, 욕망, 커피, 고통, 인권, 잉여, 꼰대 같은 사오십대, 백수, 가난, 몸, 페미니즘...이 중 하나만 들이대도 외면하고 싶을만큼 묵직한 소재들입니다. 글이 그렇지 않은 것은 참 다행입니다. 무거운 책들을 적재적소에 인용해 '그의 힘이 진지한 독서력에서 나왔겠구나' 짐작하게 만듭니다. 반면 그의 솔직담백한 경험담들은 '찌질한, 잉여의, 울기도 애매한' 20대의 모습을 까발립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무기는 20대에 의한 '공감'이며, 두번째 무기는 20대의 이유있는 '항변'이고, 세번 째 무기는 20대의 '반성'입니다.

공감과 반성은 그럭저럭 이해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는 왜 묻지도 않은 항변을 하는걸까? 그게 궁금해집니다. 20대인 그가 강요받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걸 짐작하게 할 만한 구체적인 이유는 책의 막바지쯤 나옵니다. 저자는 용감하게도 '사회과학서로는 이례적으로 10만부가 넘는 판매부수를 기록한'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를 까기 시작합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살짝 실망했다. 20대에게 눈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20대를 88만원 세대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곳곳에서 읽어지는 80년대 학번의 향수와 꼰대스러움은 나를 종종 기겁하고 경기 들리게 하였다. 
 우석훈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메시지는 이 책의 표지에도 잘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이다. 하지만 나는 바리케이트도 짱돌도 불편했다. 누군가에게는 토플 책과 토익 책 그리고 토익 성적표가 짱돌이고 바리케이트이다. 게다가 김예슬 선언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고려대 짱돌은 사회에 파장을 줘도 지잡대 짱돌은 개소리로 치부되기 일쑤인 상황에서 우석훈의 "짱돌을 들라"는 20대에게 또하나의 책임론일 수밖에 없다.


 
 '책임론일 수밖에'. '불편한 바리케이트와 짱돌'. 제가 <88만원 세대>를 읽어봤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우선은 저자의 말을 따라짚어봅니다. 말하자면 책임론은 무책임하고 바리케이트와 짱돌은 멀고도 멀다는 얘깁니다. 촛불집회로 유희하고, 쇼핑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한 당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 속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몸으로 체험한, 문화 유전자를 재생산 하는데 가장 유리하게 설계된 20대가 듣기에는 개소리라는 겁니다. 우석훈이 어떻게 말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의 분노가 어디서 출발했는 지는 알 것 같습니다. 20대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는 거죠. 그래서 저자는 말합니다.

기성세대들의 놀이판은 재미없다, 우리 이렇게 찌질하지만 우리 방식대로 잘할려고 하고 있다, 반성도 할꺼지만 너희 처럼은 아니다, 우리 인권감수성 고통감수성도 가져보고 대들자, 등등.. 통쾌함도 있고, 진실한 반성도 있습니다.

그는 또 미묘한 문제들을 한꺼풀 벗겨 짚고 넘어가려는 시선도 보여줍니다. 쉼없이 재생산되고 예쁘게 포장되는 여행기록에 대해서 '사람들의 가난한 삶을 찍고 그것을 향수로 버무리고 여유로 덧입혀서 생산해내는 여행기'라고 비틀고 그런 여행기 속에서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이자 관람자로서의 잔인함이 탄생한다고 말하죠. 때론 속 깊은 반성도 합니다. '치약 선전에서 사람의 입 냄새가 닿는 거리가 46센티미터라고 하던데, 그건 아니다. 46센티미터는 내가 타인과 두는 마음의 거리다.'라며  '그 사정거리에서 안도한다'고 말이죠. 결국 '나는 사회성이 참 좋다고 자위한다'는 자각으로 이어집니다.

간당간당 20대인 그의 요구는 점점 분명해집니다. '조이고 도망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세상헤게, '인생의 유예기간이었다는 빛나는 20대의 청춘마저 침범하여 닦고 조이고 기름칠할 것을 주문'하는 어른들에게 유예기간을 달라, 우리의 잉여질은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의 시선에 간혹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여성주의 혹은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노력'을 요구합니다. 광화문에서 진행된 잡년행진에 대해서는 "내가 잡년처럼 입건 뭐처럼 입건 내 몸에 손대지 마!"라는 메시지를 끌어내 몸의 자기결정권을 이야기합니다. 이 두 부분에 대해서는 목소리 내기에 그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에히리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언급하며 '인내'만 부각한 것도 아쉽구요. 언제 이야기 나누고 싶네요. 20대의 그녀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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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아이고 아이패드 igo ipad | 유동길 지음 | 다할미디어 펴냄



“이게 아이패드라는
건데요. 가지고 다니면서 인터넷도 하고 여러 작업도 할 수 있는 컴퓨터예요. 쉽게 생각하면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섞어 놓은 거라고 보시면 해요.” 《아이고 아이패드》 소설 속 주인공 찬수가 아이패드에 담긴 사업 자료를 보여주기 전에 꺼낸 말이다. 찬수 뒤에 숨어 있는 건 당연히 이 책의 저자 유동길. 

 애플리케이션 제작․컨설팅업체의 대표이자 앱 개발자들을 위해 KT에서 마련한 개발지원 공간인 이코노베이션(Econovation)센터의 회원으로 활동 중인 저자가 태블릿 PC의 선두주자격인 ‘아이패드’ 사용설명서를 내놓았다. ‘찬수’라는 인물을 통해 기기 사용법, 앱 활용법, 장단점 등을 상황에 맞게 보여주고, 왜 태블릿 PC가 변화하는 컴퓨팅시대의 대표 아이콘인지를 사용자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각종 수치와 차트, 전망, 어려운 IT용어로 가득했던 전문서적에 갑갑했던 독자라면 반가울 책. 

 책은 크게 ‘소설’과 ‘기사’라는 두 가지 구성으로 아이패드에 접근한다. 문손잡이 특허를 내고 사업을 시작하려는 찬수. 그가 여러 인물들을 만나서 아이패드를 시연하고 경험한다는 설정이 눈여겨볼 만하다. 아이패드에 문외한인 두 사기꾼 형님, 아이패드를 능숙하게 다루는 똑똑하고 예쁜 제니, 아이패드 특집기사를 써야 하는 도훈 선배, 부모님, 어린 조카 등이 등장해서 다양한 직업군과 연령대에 맞는 친숙한 활용법을 보여준다. 

 가령 아이패드로는 ‘전화를 걸지 못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3G나 와이파이(Wi-Fi)를 이용한 인터넷전화 사용법을 알려준다거나 부동산 등 사업 분야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예들을 다양한 사진을 곁들여 설명하는 것이 그것.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는 소설은 통속적이고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주제에 접근하는 데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이다.



액자식 구성에
속하는 두 번째 장치는, 주인공 찬수가 신문기자인 도훈 선배를 도와 쓰게 되는 아이패드 ‘특집 기사’ 네 편이다. 이 기사들은 아이패드의 장점을 한층 부각시킨다. 직관적인 사용이 가능해 중장년층이나 장애인들이 많이 쓰게 될 것이라는 내용, 전자책 뷰어로서 최적화된 기기환경 등을 다룬다. 하지만 기대했던 ‘기사’의 전문성보다는 소설의 연장선 같은 성격이 강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특히나 아이팟이나 아이폰을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싱거울 내용.   

 저자는 ‘애플빠’(애플사 제품 마니아)라는 시선을 의식한 듯 그에 대한 변명(?)도 잊지 않는다. 아이패드가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을 새로운 컴퓨팅기기 중 하나임을 강조하고, 아이패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진 검색을 통해 그 속이 ‘대부분 우리나라 제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책이 아이패드에 대한 찬사 일색이라는 비평에서 쉽게 비껴갈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애플사의 제품군이 배타적 시장을 형성해 IT, 모바일, 전자책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소비자는 없을까? 국내 기업은 어떤 대응으로 맞설 것인가? 국내 결제프로그램이 구동되지 않는 부분이 저자의 말처럼 쉽고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일까? 수만 개의 앱 중 유용한 앱은 몇 개나 될까? 범용기기는 만능일까? 나머지 선택은 똑똑한 소비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종이책 동시출간, 쿡북카페 http://bookcafe.qook.co.kr/main.dpp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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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아이폰과 아이패드 애플의 전략 | 최용석 지음 | 아라크네 펴냄


 저자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중심으로 한 애플사의 전략을 ‘애플생태계의 출현’이라고 표현한다.
그 생태계의 중심에 있는 것이 ‘자사의 하드웨어에 혼을 불어넣는 아이튠즈’라는 프로그램. 아이튠즈는 애플사에서 개발한 앱장터로 기기를 응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현재 34만 개(1월20일 현재)에 육박하는 공룡 플랫폼이다. 

 아이팟이나 아이폰 유저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애플은 아이팟용 음원 재생 프로그램으로 개발된 아이튠즈를 확장시켜 앱스토어로 개방했다. ‘애플은 시장을 만들었고, 그 시장은 개개인들의 힘으로 수요와 공급을 이어가는 일종의 생태계가 되었다’는 게 저자의 말. 바로 여기에 애플의 핵심 전략이 있다고 책은 말한다. 
 
 애플이 콘텐츠 유통시장을 ‘플레이어들이 창의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하고 오히려 기기는 단순화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창출하는 콘셉트’로 사용자의 요구를 누구보다 잘 파악해냈다는 것이 요지. 

 이처럼 애플의 전략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첫 번째 장에서는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몰고 온 모바일혁명에 대한 세밀한 분석뿐만 아니라, 애플을 공략할 ‘한국 기업들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역설하고자’ 하는 저자의 통찰을 담았다.

애플 직배로 영화가 공급되거나 광고를 거래하는 애드스토어가 생길 가능성, 검색시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운영체제, ‘거실의 제왕’을 꿈꾸며 던지는 메시지 등 애플사의 음흉한(?) 계획들을 예측하는 동시에 국내 기업들의 정책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그것.  

 실제 국내 이통사들이 ‘철의 장막으로 무선망을 오픈하지 않았던’ 정책이 아이폰으로 허물어졌고, 삼성과 LG가 IT하드웨어산업만 편식해온 동안 애플은 ‘소프트웨어의 유통 영역을 만들어’ 전체 수익을 내고 있다. 또 구글이 안드로이드 플랫폼으로 애플의 움직임에 적절히 대처한 전력 역시 우회적으로 국내 기업이 새겨들을 만한 사례다.


 그런 이유로 책은 ‘애플의 전략’에만 목을 매지 않는다. 나머지 2장과 3장에 ‘모바일혁명이 촉발한 포털간 전쟁의 서막’과 ‘미래의 검색과 모바일 인터넷시대 마케팅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우선 스마트기기에서의 핵심 IT용어들을 키워드로 세계적인 모바일기업들의 전략을 보다 꼼꼼히 살펴본다. 클라우드 컴퓨팅, 시맨틱 웹, 증강현실 등 새로운 디지털시대의 컴퓨팅환경들을 가상 시나리오까지 동원해 보여준다. 용어는 알기쉽게 설명하거나 박스 형식으로 풀이를 적어두었다. 

 또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즈니스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싶다’는 저자의 의도대로 새로운 인터넷비즈니스와 마케팅환경 변화에 대비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스마트폰 출시 이후로 시너지 효과를 주고받는 소셜미디어 기능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콘텐츠가 없는 스마트기기를 ‘깡통’이라고 부르며 디지털콘텐츠가 다양한 형태로 매우 폭넓게 제작될 것이라 예상한다. 이밖에도 ‘출판업종이 콘텐츠출판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테이크오버’되거나 이북(e-book)이 광고를 달고 등장하게 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인터파크, 쿡북카페 (http://bookcafe.qook.co.kr) 전자책, 종이책 출간,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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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전자책 리뷰①

전자책의 충격
e메일이 ‘메일’이듯 e북도 그냥 ‘북’이다?

사사키 토시나오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 한석주 옮김 | 종이책 동시출간, 북큐브(http://www.bookcube.com/) 에서 전자책으로 구입 가능 6,500원 

 

아마존 킨들 DX

2009년 크리스마스 시즌, 미국의 대형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서 전자책 판매량이 종이책을 넘어서는 ‘사건’이 일어난다. ‘킨들’(아마존 전자책 전용 단말기)의 위력을 실감하자마자 바로 다음해 4월, 애플사에서 출시한 ‘아이패드’는 ‘킨들’과는 다른 범용기기의 매력으로 전자책 시장에 불을 붙인다. 이는 전자책 콘텐츠를 가진 ‘플랫폼’의 충격에 가까웠다. 
 
이 책의 일본인 저자는 미국 발 전자책 열풍을 적극적으로 흡수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킨들과 아이패드의 상품평 ‘리뷰’로 몸 풀기를 한다면, 전자책 시장의 생태계를 쥐락펴락 하게 될 ‘플랫폼 전쟁’을 중계하고, ‘자가 출판의 시대’가 가져올 격변들을 예측하는 데로 나아간다.

일본의 출판, 유통계를 비판하는 4장에 이르러서 ‘지켜야 할 출판문화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며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성장하려면 ‘기존의 유통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까지 앞세운다. 

일본의 휴대폰 소설 열기나 구글에서 시작한 책 검색 서비스에 반발하는 일본 출판계를 두고 ‘고령자들의 비뚤어진 시선’ ‘인터넷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악평을 이어가며, 불행한 독자들을 구원(?) 해 줄 하나의 매개가 바로 ‘전자책’이라고 주장하는 저자 사사키 토시나오. 
  
 
‘예전에는 인터넷으로 보내는 메일은 ‘email’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e’가 없어지고 그냥 ‘mail’이 되었다. 얼마가지 않아 ‘ebook’도 그냥 ‘book’이라고 부르게 되지 않을까?‘ (머릿말에서)

미국의 한 블로거가 한 말이 이 책에 인용되자마자 국내 전자책 관계자들이 ‘전자책의 장밋빛 미래’를 선보이기 위해 너도나도 인용했다. 종이책도, 편지가 사라졌던 수순을 밟을 것이란 최대치의 전망이다. 책은 이렇듯 전자책을 편애하는 시각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특히 디지털 세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음악시장을 모델로, 걸음마 단계의 전자책 시장을 대입해 방향을 제시하는 설득법이 인상적이다. 킨들이, 애플사의 음악 재생 프로그램인 아이튠스를 베껴 ‘전자책 리더뿐만 아니라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 다양한 기기를 활용해서 동시에 읽을 수 있게 네트워크를 구축’ 하면서 책의 ‘엠비언트’(저자: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것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뜻)를 높였다는 것이다. 
 
책의 엠비언트는 음악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매스컴 중심의 소비스타일이 쇠퇴하고 지금의 ‘나’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의 새로운 소비 맥락을 만들 거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소셜미디어임을 강조한다. 트위터나 블로그를 통해 음악과 저작물을 직접 판매하는 사례를 들어 전자책이 ‘거대한 지적 공간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도구’가 될 것임을 예상한다.

전자책을 음악 시장에 비유하면서 끌어간 저자의 논리는, 아직 안개 속인 우리네 전자책 시장에 던지는  밑그림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책과 음악은 다르다’ 두 시장을 기계적으로 대응한 부분들은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저자 나름대로 전자책의 ‘충격’을 완화할만한 장치를 골랐겠지만.
 
이 책을 옮긴 한석주씨의 번역 과정이 흥미롭다. 일본판 <전자책의 충격>이 전자책 이벤트를 한다는 트위터의 글을 보고 책의 출간을 제의, ‘아이폰’과 노트북만으로 번역을 완성했다고 한다. 책이 강조한 소셜미디어의 기능을 활용해 시공을 뛰어 넘는 전자책의 모델을 보여 준 샘이다. 
 
역자후기 뒤에 덧붙인 50쪽 가량의 ‘보론’도 볼만하다. 전자책 1세대 업체 대표, 출판사 대표, 언론정보학과 교수 등 국내 전자책 시장의 맨 앞에 선 인물 다섯이 한국전자책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준다. 일본 특유의 책 유통환경이나 서점문화, 휴대폰 소설 같은 이야기가 적지 않았던 책에 균형을 맞춘다.  
  


아이패드












리뷰는 <라이브러리 앤 리브로>2011년 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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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338064

오늘도 다시 쳐다봤다. 어제도 그랬고 아주 옛날에도 그랬다. 대놓고 보지 않아야 된다는 묵언으로 흘끗봤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어쩌면 더 힘차게)팔 다리를 내저으며 내 삶, 비장애의 영역으로 되돌아 온다. 나는 이제 그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엄마손을 꼭 쥔 아이는 묻는다. 

"저 사람은 왜 휠체(어)를 타고 있어?" 

그렇다. 전혀 무관하지 않다. 아이를 낳으면 무관심이야말로 특권이 된다. 나와 무관한 일은 거의 없어져버린다. 드세고 대차지지만 아줌마는 물잔을 찰랑거리는 감수성도 가지게 된다. '미담'은 더이상 예쁜 이야기가 아니라 아줌마가 그려야 할 미래의 붓칠이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더블 테이크>가 미담은 아니다. 연하지도, 강인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우스꽝스럽게 꼬꾸라지고 놀랄만큼 담백하다. 두 다리 없이 태어난 20대의 이야기치곤 무척 가뿐하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는, 실은 시선을 'take'하는 우리의 눈은 그다지 가볍지 못하다. 굉장한 불운을 목도하는 상대적 안도감일지도 모르고 우리와 다른 신체에 깃든 고통스런 사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정적 불편함을 감수하고 읽어야 하는게 장애 극복기고 더불어 '나도 사는 데 너도 살아라'같은 용기를 채집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원제 'double take' ) 케빈 마이클 코널리/황경신 옮김/달




더블 테이크(double take) ; 「문득 갑자기 다시 돌아보는 것」글자 그대로 또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람 또는 사건의 의미에 대해 '문득 갑자기 다시 돌아보는 것'

하지만 이 책, 지금 우리얘기하는 거 맞지? 되돌아보는 우리와 시선을 맞추자는 거지? 왜 쳐다 보냐고 묻는 거 맞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감출수 없는 호기심에 대한 정당한 태클?

아얘 사진까지 찍어두었군. 촛점의 흔들림도 개의치 않고 올려다 본 구도로 찍힌, 두려움과 호기심이 깃든 아이들이나 떫고 노골적인 표정의 어른들. '이것은 다리없는 사람의 스케이트보드입니다'라고 적힌 구르는 판 위에서 이른바 '더블 테이크'를 포착한 수 백 수천 개의 컷 중 18개의 사진이 각 장을 장식하고 있다. (총19장으로 되어 있지만 나머지 한 장은 저자 케빈이 스키타는 장면이다) 

사실, 이 사실은 명백한 스포일러다! 중반 이후 서서히 밝혀지는 사진의 각도에 정말로 책을 'double take' 했으니 말이다. 말을 꺼냈으니 다시 담지는 않겠다. '이건 '역전'이군.' 속으로 생각한다. 그 사진 속에서 감시자는 우리가 아닌 그다. 그러나 어쩐지 케빈이 통쾌하지만은 않다. 이게 무슨 꿍꿍인지 고민하고, 장애를 '이용'하는 수작이 될까 걱정도 한다. 

'자경단 퍼레이드'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 케빈이 속한 팀은 본디 없었던 다리를 이용해 유혈이 낭자할 신체절단 이벤트를 벌일 계획에 들뜬다. 케빈은 팀에 기여하는 자신의 역할에 거의 병적인 자부심에 차 있었고, 약간의 실패조차 예감하지 못했다. 불쾌감이나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던 구경꾼들 덕택에,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든 프로젝트에 대해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되묻는다. 

그는 다시 본격적으로 '장애 재활용'프로젝트를 구상한다. 바로 더블 테이크의 시선을 붙잡는 이 사진들이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각국의 많은 도시들을 스케이트보드와 맨손으로 누비면서 쳐다보는 사람들을 카메라로 쳐다본다. '뒤 돌아봐'라고 주문을 걸 판이다. 달라진게 있다. 적어도 그가 웃음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감정이 몰려 온다. '수동적이면서도 공격적인' 복수의 형식이기도 했고, 일종의 치료법, 카타르시스 이기도 했지만 이기적인 목적임을 자각한다. 
 
그 고민들이 명확히 해결책을 찾은 것 아닌 듯 하다. (케빈은 이제 겨우 스물셋이다!) 어쨌든 그는 끝까지 갔다. 그가 받은 시선들을 되돌려 주었고,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고도 싶었다. 낭떠러지 앞에 서 본 사람은 안다. 이제 반대 쪽으로 몸을 돌려 다시 힘껏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가 큰다면 성공담 말고, 이런 도전기와 분투기를 권하고 싶다. 게다가 그의 작문실력은  A+++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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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옷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 밖에서 엄마를 말하면서도 가장 엄마다운 엄마가 부각되는 점은 아이러니다. 박소녀라는 '엄마' 속에 존재하는 '키우는' 유전자는 비단 피붙이들에게만 발휘되는 게 아이었다. 집을 들고 나는 몸뚱이들, 시들어 가는 채마들, 심지어 엄마가 없는 아이들(고아원 후원)에게까지 입술 가까이 밥풀을 붙여 줄만한 실력을 뽐낸다. 더욱이 비릿한 연애의 주인공, 곰소의 사내도 미역국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줘야 하는 모성발휘의 대상이었지 않았나.
 
그러기에 엄마의 상실이 비탄할 만한 것이었고, 극적인 후회와 애통을 위해서 엄마는 부득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탄할 만한 일은 세상의 엄마들이 조금씩은 박소녀를 품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이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끝끝내 '희생'의 면모에 대해서는 거부했지만 백만이 넘는 독자들의 공감 영역에 '희생'을 제외한다면 '엄마 신드롬'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희미해진 감성에 불을 붙이고 톱아보게 한 중심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엄마의 낯선 이름이 아닌 각자의 내면과 상상에서 불러온 '엄마'라는 고유명사였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쯤해선, 지난해 한 작가가 낳았던 '엄마'라는 매끈한 달걀을 깨야할 차례다. 희생과 감내와 침묵과 외사랑이 아닌 질투와 이기와 비난과 강제의 엄마 말이다.
 
어디에 그런 엄마가 있냐고, 뉴스에나 나오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비운의 여인들을 말하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당신의 엄마는 만족스러운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모녀의 관계는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들은 한 쪽으로 기울었을 때 더욱 안정적으로 보인다. 세상의 어떤 관계들은 무게가 달라야 삐걱거림이 없다. '화를 내더라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표명하라'는 육아의 코치는 곰이나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 같기도 하다.



질투와 이기와 강제의 엄마
 
기본적으로 불공정한 관계의 함수가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라는 심리학 서적의 존재 이유다. 전폭적인 지지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반대로 지나친 참견과 관심으로 딸과의 분리를 인정하지 못했을 때, 세상 모든 딸들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부득이하게 시소를 움직이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세상 모든 엄마도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엔 바야흐로 수많은 엄마들이 등장한다. '박소녀 유형'은 제외되는 듯 하다. 하지만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에서도 <엄마를 부탁해> 만큼이나 '나의 엄마'가 쉴새 없이 뛰쳐 나온다.

자신이 받아왔던 외모에 대한 평가 때문에 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삶의 기준을 전달하는 엄마, 결핍에 대한 만족감을 위해 딸을 꼭두각시로 세우는 엄마, 자신과 딸을 일체시켜 딸의 독립을 가로막는 엄마, 주체적이지 못해 중요한 결정들을 남편에게 미루는 엄마, 쓸모있는 순간에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자아상을 형성시킨 엄마.  


딸을 부탁해

이 책이 그런 엄마들의 딸 이야기, 즉 피해자의 심리치료서라고 단정하진 말자. 앞서 괄호 안에서 말했듯이 이 엄마들도 '엄마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를 상상하고 자신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은 <엄마를 부탁해>같은 허구가 보여주는 '내력의 힘'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이해하는 관용을 베풀라는 지시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성급한 공감은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살인을 하게 된 어떤 핍박한 이유들도 범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처럼 '엄마를 이해하기'보다는 행위와 감정들을 제대로 꺼내보자는 취지다. 그런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가 더이상 '자신을 향하는' 바보같은 일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엄마 역시도 할머니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물려받은 것들을 전해줄 가능성이 크다.   

또 이런 증상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접어야 한다. 현재 자신의 편협한 관계망이나 왜곡된 자아상, 자신의 딸을 대하는 불안한 태도들이 거꾸로 엄마를 발견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불행의 모든 연유를 과거나 타인에게서 찾는 것은 어리석지만 그것을 간과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구체적인 치료의 과정들은 불가의 명상 수행법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판단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 하지 말고 이 분노 자체를 느껴봐야 한다. 그러면 분노를 더욱 잘 다스리게 되고,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할지 아니면 아예 표출하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다. 분노는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우리 곁을 계속 맴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더는 분노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

분노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슬픔 역시도 '드러내기, 내버려두기, 밑바닥까지 느껴보기' 단계로 진행하라고 말한다. 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사적 행위들이 과장될수록 진실에서 멀어질 지도 모른다.


엄마옷 벗기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불러온 건 기쁜 일이지만 완벽하게 정형화된 엄마를 통해, 엄마를 급하게 용서하거나 미화할 가능성을 벗겨버리고 싶진 않다. 엄마는 있는 힘껏 자식을 위하지만, 작가가 직접 말했듯이 '그것이 동등하게 엄마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엄마도 누군가의 영향력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배운 '딸'임은, 엄마의 왜곡된 목소리를 죄책감없이 가려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로라 아렌스 퓨어스타인/애플북스/2010.5
엄마를 부탁해/신경숙/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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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뒤에는 남성, 이라는 화자와 남성,이라는 작가가 우뚝하게 서 있다. 평범한 언어로 예민하게 일상의 부조리를 끌어내는 '여성스러운' 화자들에게 지극히 공감해 왔다는 사실을 거꾸로 자각하게 해준 소설집.  

소란스럽고, 미묘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여성스러운' 소설의 단서라면 <숨결>은 앞의 모든 형용을 거세한 채 던져진 살덩이 같다. 상처에선 정확히 피가 흐르고, 한계의 구분선은 명징하고, 동물적인 욕망은 직선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에 발을 담근 기분이다.
 
아시다시피 남성작가들이 모두 이런 소설에 합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영미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부엌과도 같은 협소한 공간과 단순한 동선, 식탁과 침대에서의 대화, (거의 감지하기 힘든)약간씩 뒤틀린 관계만으로도 지속가능한 파장을 보여주었다. 그를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굵직한 서사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는 예민한 감각으로 무장하긴 마찬가지다. 반면 헝가리 여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이만큼 잔인하게 남성화된 문체를 만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드는 작품이다.
 
얼마 안되는 소설편력까지 끄집어 낸 건 이 단편들의 지독한 설정들 때문이다. 교통사고 가족이라 명명한 레커차 운전기사가 끝내 맞는 불운은 집 나간 부인의 시체를 아무것도 모른채 끌어 날랐던 지난 밤이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의 현대판일까?) 동영상 과외 강사로 절제된 식사와 충분한 정욕을 집안에서 모두 해결하는 정 박사는 절대 자기가 히키코모리가 아니라고 웅변한다. 서민의 한달치 월급봉투를 단번에 숍에 지불하는 사서와의 보름간의 희롱에 '어머니, 제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서울에서 부잣집 딸 만나서 호의호식하고 있어요'라고 뇌까리고 마는 남자는 원룸텔로 돌아와 쓸쓸하다. 

생략의 생략을 거듭한 진술서들이 무척이나 불리해 보인다. 누굴 대변하고 누굴 비난하는 건지 쉽게 편들기가 힘들다. 물론 <숨결>의 모든 포즈는 시니컬이다. 주장을 담지 않고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르다. 도시의 꿉꿉한 삶을 다루는 것만으로 그의 시선은 만천하에 드러난 샘이다. 그러므로 '사회 비판'이라는 철지난 모토는 미뤄두자. 

문제는 그가 삶을 소화해내고 있는 방식이다. 다분히 직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적 서사의 진행은 소설 속의 삼류극장 간판 마냥 촌스럽고 동시에 아득하기도다. 비극의 무대에 올려진 주인공들은 고통을 향한 대사들을 응집하고 그외의 생의 이면들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것만 같다.  

이 아주 오래된 소설적 기법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건, 여태 실은 다양하다고 할 수 없는 여성적 섬세함들이 지배하고 있는 소설들을 읽어왔기 때문이겠다. 지나친 자기 고백과 자아 성찰에서 한 걸음 물러나 '소설'이라는 '거짓말'을 되살리는 이 무뚝뚝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대단한 발견도, 중요한 변수도 아니지만 '이야기'를 마주하는 내 눈은 두 개의 동공만큼이나 균형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숨결/김정남/북인/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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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변이 오글거립니다. 먼 함성이 창에 불 켜진 여러 집을 합친 건지, 어디 특별 행사장의 모둠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네요. 지금 우리는 이기고 있습니까. 이 새벽에 배달차 소리가 산발적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합니다. 동네에 촘촘한 수비망을 형성한 치킨집 사장님들의 승리군요.  

(그 사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네이버 실시간 중계를 띄워놓고 있었습니다. 작업은 물건너 갑니다)

경기장이 법정이라면 어떨까요. 후반 추가 수혈된 김남일의 지나친 혈기가 실추한 패널티 킥에, 변호사가 고용된다면? 어쨌든 16강 진출이라는 큰 목적을 달성했기에 과실이긴 하지만 치사는 아니었다. 과장없이 변호할 수 있겠습니다. <법정의 고수>에 의한다면 말이죠.

 
<법정의 고수>/신주영/페이퍼로드/2010.6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법이 불행에 둥지를 튼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해집니다. 반대로 '단 한 사람'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행복의 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기도 합니다.     

늘 억울합니다. 차인것도, 탈락한 것도, 주머니가 가벼운 것도 모두 내 탓이 아니길 바랍니다. 교통사고도, 사랑도, 다툼도, 내가 옳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바쁩니다. 내 억울함을 증거할 단서들이 어디든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법정은 철저한 증거주의 입니다. 이의 반대기조인 자유심증주의도 안전장치로 증거능력 안에서 자유심증합니다. 현대의 증명적 사고는 법정과 맞닿아 있는것 같습니다.

좀 더 합리적으로, 단 사진 한 장 이라도, 단 한 줄의 인용이라도, 공인된 인물의 권위를 빌어서 나의 주장을 증명하려는 증거주의 사고가 널리 통용됩니다. 진실이 진실 스스로의 힘으로 드러나는게 아니라 밝혀야만 되는 어떤 주장들 속에서 뒤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부득불 씁쓸한 곳에 사람냄새 물씬 나는 변호사가 떴습니다. 법정을 삶터로 바꿔 씁니다. <법정의 고수>는 법조계의 숨겨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승소와 유불리, 증인, 증거, 판례, 법조항, 날카로운 칼날을 쥔 직업인이 차가운 세상을 비비는 내용입니다. 편하고 재밌습니다. 소설 한 편만큼 잘 읽힙니다. 고민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공격적인 변론서라기보다는 감정적인 탄원서에 가깝습니다.  

법조계의 드라마틱한 성공사례나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사건 보다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교통사고, 이혼, 간통, 사기, 연대보증 같은 평범한 사건들을 다룹니다. 십년차 변호사가 괴나리 봇짐을 이고 떠나는 자아여행 같습니다. 전혀 과장된 몸부림도,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도, 감격스런 현장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속에 잠복되어 있는 보편적인 고민이 법과 만나는 지점이 이상하리만치 다정합니다.  

부모님이 당했던 사기로 노무현, 이성암 변호사를 차례로 만난 어린시절 이야기로 행복한 시동을 겁니다. 돈을 주고 사야하는 변론에 약간의 온도차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후로 줄줄이 이어지는 법정의 사례들은 신주영 변호사(저자)의 보온으로 따숩습니다. 피고와의 적극적인 공감, 연민부터 사법연수생들의 고충, 법조인의 업무환경, 법정 고수들의 역전되는 수, 실패한 변론들, 신나는 승리보다 신명나는 고민들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판사를 설득하려면 판사의 말을 써야한다는 조언처럼 그녀는 독자의 말을 몸으로 익혀 흔들리는 인간의 변호사가 됩니다. 그녀도 세상의 법을 익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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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제국익문사1,2>/강동수/실천문학사/2010.5


역사소설이라면 슬슬 피해다니는 제가 300여 페이지의 두 권을 흡입하듯 읽어내렸습니다. 초반부의 몰입이 쉽진 않았지만 일단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고나니 체스판에 옮겨지는 말을 보듯 경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경기'라는 표현이 이 소설의 묵직함에 비하면 천박하긴 하지만 첩보의 수를 읽어내려는 고수들의 신경전이 <제국익문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입니다.

과연 이 재미가 없었다면 조선말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명성왕후 시해와 잇따른 암살, 고종시대 비밀정보기관 '제국익문사' 등, 제법 딱딱한 역사적 사료들이 술술 넘어갈 수 있었을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더구나 짧은 호흡과 감각적인 문장에 길들여진 제가 굵직한 서사와 고풍스런 우리말 어휘에 쉽게 달라붙진 못했는데, 이 또한 <제국익문사>의 외피로서 보기좋게 어우러지면서 어느덧 별다른 장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경술국치 백 년을 맞아 '이유있는 독서'를 해보고자 두 번째 펼친 소설이 독서의 스펙트럼을 흔쾌히 넓힐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난제는 책과 여러부분 소통한 후 쓰는 독후감의 역량이 부족하군요. 그래서 그 어느때보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소설가 조정래의 서평을 먼저 옮겨 봅니다. 

...우리는 자칫 일제강점기를 박제품과 같은 것으로 방치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이 각별한 소설은 '지금, 여기'의 삶과 백년 전의 삶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박제된 역사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장쾌한 서사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애국과 매국 사이에서의 갈등을 다루는 균형잡힌 시선에 신뢰가 간다. 가히 경술국치 밴 년만에 나온 '대한제국 멸망사'로 읽힐만한다.(중략)
 
맞습니다. <제국익문사>는 조선말 국가첩보기관의 애국사상을 담아내는 지당한 과정이 빠졌습니다. 오히려 큰 줄기의 서사는 매국노, 즉 국모시해에 연루된 인물 우범선의 뼈아픈 감정기록입니다. 작가가 말했듯 '우범선은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당대 개화당의 이념이 뭉뚱그려져 육화된 인물'입니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애국자라면, 목숨을 버리고라도 한 나라의 왕과 왕후를 지켜내야하는 수구당의 첩보기관이라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절절한 이유를 마주하는 심정이 분노로만 설명될 순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피해자도 승리의 감격도 얻지 못하는 역사의 딜레마를 겪는 첩보요원, 이인경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명성왕후 시해 이후 또 다시 고종을 겨눈 총구를 수색하는 그의 첩보전이 역사소설 밖의 현란한 스릴을 선물합니다. 이 허구는 김옥균의 삼일천하로 불발된 개화파 정권이 다시 부활을 꿈꾼다는, <제국익문사>의 가장 발칙한 역사적 가정을 안고 있습니다.
 
한 때는 동지였던 개화파와 수구파 대표인물들의 라이벌전을 통해서 독자는 세계관의 대립을 구체적으로 목도할 수 있습니다. 나라로 상징되는 국왕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의롭고 이로운 일이라고 믿어왔던 역사관에 의한다면, '매국노, 반란'이라고 단정짓기 편하겠지만 그들 역시 '나라를 구하는 길'을 반대로 상정한 것에 다름없었습니다. 

왜와 청국과 아라사 사이에 끼여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 같은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직도 반상만 따지는 저 북촌 세도가 무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민씨네 척족들이 말하는 개화라는 것은...진실로 나라를 지키고 부강케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저네들의 권세와 부귀를 잃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권력의 울타리를 치려는 것임을,(중략)-소설 속 우범선의 비망록에서 

이것이 '갈등을 다루는 균형잡힌 시선'이며 '명성왕후로 대표되는 수구당이 과연 올바른 노선을 밟았는가'란 작가의 의문일것입니다. 덧붙여 그들 모두의 실패는 역사적으로 예견된 것이었지만 그 이유, 즉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보적인 명분으로 합중공화를 꿈꿨던 개화파나 봉건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수구파 모두 각각 일본과 청, 즉 외세의 힘을 빌었다는 점이 '대한제국 멸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드러납니다. 게다가 봉건세력은 세계사의 흐름에 둔감하여 새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거의 되있지 않았습니다.

거참, 그래서 박영효가 미국을 본떠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로군. 나라라는 것은 세세연년 이어진 왕통이 있어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창맹을 돌보는 게 아닌가. 여기 왜국도 총리대신 국사를 받들지만 천황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은 게 아닌가. 창맹들이 세상물정을 어찌 알아서 임금을 뽑는 다는 거지?" -제국익문사 요원 유석하의 말.

경술국치 백 년에 필요한 것이 민족감정을 앞세운 애국심의 고취도 아니고, 야욕을 품은 외세에 대한 비난 역시도 아니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약소국의 처지를 비탄하고 피해를 곱씹기 전에, 우리가 이미 독립을 잃은 객체였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익히 습득해왔던 진정한 애국도, 매국노의 그들만의 우국(優國)도 진짜 핵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한치 앞이 낭떠러지라고 해도 다른 패는 없었지만, 후대는 객관적 역사 돌아보기를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수순처럼 들이닥친 주권침탈, 저홀로 고독한 테러리스트가 된 첩보요원 이인경의 독백을 들어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 장동화의 길도, 우범선의 길도 결국엔 나라를 지켜낼 수 없었다면,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선 참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야 할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겨울과 같은 인고의 시간이 지나야만 그 해답의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지난 백년 참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온 우리의 답이 '애국'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제국익문사>를 덮습니다. 



20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100년, 두 편의 소설을 이어읽다. <기누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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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축구는 한일전이 제일 재밌지' 아르헨티나 전을 보며 남편이 한 말이었습니다. 경술국치 백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백년이면 세월의 강물만도 억만겁은 흘러갔을테고, 우리에게 일말의 앙금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을법도 한데 '역사'는 전혀 그럴 의향이 없나봅니다. 

하긴 위안부의 삶을 처철히 재현한 권윤덕의 그림책 <꽃할머니>를 말끄러미 보고 있자니 흘러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역사의 각인을 되새기게 됩니다. 해소되지 않은 치욕과 분노는 언제고 되살아 나 복수심을 일깨웁니다. 한일전이 재밌는 건 이겼을 때의 쾌감이 남다르기 때문이겠지요? 또 스포츠만이 선사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의 싸움이 일견 한일관계의 어긋난 부분을 보상해주기도 합니다.
 
네, 그러고보니 한일전이 진짜 재밌어보이기도 합니다. 한 번쯤의 승리에 찾아오는 우월감보다는 역사의 속내를 뒷주머니에 찔러넣고 누구나 앞마당에 모여 무기없이 알량한 조약 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이 세계는, 코 앞에 닥친 백년 전의 치욕에 비하면 너무도 평화로우니까요. 고통을 유희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분노의 처분법은 맨 먼저 분노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우월감인 용서는 분노를 덮어버리고 심지어 자괴감마저 들게 합니다. '일본은 없다'고 거부하는 것도, 일본의 위력을 깎아내려 우리를 추키는 것도 신나는 일은 아닙니다.

지금껏 일제의 야욕만을 대한제국 점령의 유일한 이유로 설명하는 역사관에서 균형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피해자의 권리만 학습하고 누차 억울한 마음을 고한다고 해서 피의자의 주장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전 <기누가와>라는 살인추리소설을 통해 일본의 극단적인 우파들이 견지하고 있는 자세를 엿봤습니다. 말하자면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켰다는 자부심이 미화가 아닌 실화(주인공의 실화)로서 인간사에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기누가와>/단이리/나남/2010.4
 

그가 한국인 국회의원을 죽인 살인자 인데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은 지당한 비난과 분노에 역의심을 살만했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에 가한 폭력과 잔인성만으로는 경술국치 100년을 톱아보는데 큰 장애가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살인현장에서 발견하는 상대의 '입장'은 현재 내가 미워하고 있는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되묻게 합니다. 

한국의 국회의원 박민자는 민주투사이자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는 정의파로 경술국치 100년, 동경에서 대규모 항의집회를 준비합니다. 순진한 계산법으로 정당한 주장이 적법하게 발휘되는 동시에 위기를 겪고, 한일전의 한판승마냥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 전말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 단이리가 인용했듯 '역사에는 교묘한 통로들과 까다로운 복도들과 문젯거리들이 있게'(T.S. 엘리엇) 마련입니다. 그는 이것을 '우리 자신이 직접 역사에서 꺼내오는 인식과 감정들'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비슷한 말로 실제의 '역사'와 '역사의 현상'의 충돌로 바라봤습니다. 

박민자에게 역사란 정치적 계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이를데 없이 모순적인 행위를 낳기도 했습니다. 박민자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일본에 귀화해서 성공한 재일교포로 박민자의 막대한 정치자금은 일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더없이 가까운 일본인 이복자매를 두고 자신의 컴플렉스(음경선망-성기를 동경하는 심리)를 해소하는 장소로 한국이 아닌 그토록 날서게 비판한 일본을 선택했다는 사실 역시, 순수한 역사관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녀를 죽인 가즈야는 그의 핏속에 단 한 가지, 식민역사의 우월성만이 거침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조선총독부의 뛰어난 관료였다) 극단적으로 '역사'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건 오히려 박민자 일텐데 말이죠. 주검과 살인자는 이토록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역사의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의 '역사'를 죽입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둘 다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이 부분은 한일 공동의 과제처럼 들립니다. 

<기누가와>에는 사건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의 여형사 배영희를 등장시킵니다. 그녀는 가즈야 집안의 내력을 살피면서 통치자의 역사기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영희가 드러내는 사념, 고민, 혼란들을 지금 우리의 심중과 겹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경술국치 100년 째, 또 다시 주검과 살인자로 만나 물밑으로 대립하는 한일간의 입장이 수사관의 중립적 견해로 정리됩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이라는 타국으로부터 식민통치를 당한 과거는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일본에서는 막연한 피해의식이라거나 우라미(원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두고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충돌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당시 서구세력이 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므로 일본이 서구세력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로 '선택'하였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는 지금도 일본의 많은 우익인사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일종의 공리주의인데, 일본의 식민통치를 조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결과적으로 일본의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주장이지요. 어떤 이들은 식민통치가 없었다면 조선은 러시아에 먹혀 버렸거나 오늘과 같은 발전이 없었다고 공공연히 말하지요."

이후 배영희는 '반일감정'의 불성실함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습니다. 일본의 호스트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우월감을 느끼려했던 박민자의 행동으로 공허한 신념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간과 쓸개를 걸어놓고 고통을 잊지 않도록 되새기는 것은 아닐겁니다. 

<기누가와>의 해법은 살인자가 의당 받아야 할 처벌(자살)과 어긋난 신념의 단절이었습니다. 동시에 일말의 계산과 위선, 절제되지 않은 복수심을 국가주의로 위장한 박민자 역시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역사의 신념을 변형없이 가두는 것도, 제식대로 풀어놓는 것도 모두 위험한 일처럼 보입니다. 이 양끝을 가로지르는 외줄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한일관계는 분명한 판결을 기다릴 수 있는 살인사건은 아닙니다. 식민의 역사가 거대한 제국주의 속의 흐름이었음을 저는 우선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여형사 배영희의 말을 마지막으로 떠올려 봅니다. 

...동경의 한복판에 있는 일본경찰청의 책상에 앉아 100년 전에 조선에서 긴 세월을 보낸 한 일본인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역사라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일탈하여 떠다니는 하나의 먼지라는 착각이 들었다. 



20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100년, 두 편의 소설을 이어읽다. 이어 <제국익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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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