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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청춘
잘한다, 청춘 2011/12/30

"나? 이제 많이 길들여였지." 대학에 갓 입학해서 만났던 친구를 서른 둘에 다시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에 길들여 졌냐고요? 20대의 분노, 욕망, 신념과 맞서던 바깥 세상으로부터 길들여진겁니다. 어쩌면 그때..

서점 명가 로드뷰❹ 대구 물레책방

'간디의 물레'처럼 이야기가 줄줄 감겨 나올 것만 같은 대구 수성경찰서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서 50미터쯤 올라갔을까. 작은 네모 간판이 보인다. 연둣빛 바탕에 쓰인 글씨 ‘물레책방’(이하 ‘물레’). 재밌는 이야기들이..

디지털 in, 디지털人-'나모이북에디터' 박광섭 대리

나모 인터랙티브(이하 ‘나모’)가 지난 달 ‘나모이북에디터’(Namo e-book Editor, 이하 ‘이북에디터’)를 내놓았다. 이북 에디터는 1인 전자 출판 시대를 맞아 기존의 출판용 데이터나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한 파일..

서점 명가 로드뷰❸ 대전 계룡문고

이야기가 넘치고 빛그림이 흐르는 일흔 다섯 번째 ‘서점 나들이’를 가다 막 어린티를 벗은 여자 아이 셋이 ‘왜요 아저씨’를 향해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넨다. 재잘재잘 말을 붙여오는 아이들에게 이 대표는 이내 반갑게 고개를 끄..

3월 eBook new Book
3월 eBook new Book 2011/03/09

<멀티북> 아기돼지 삼형제 이지넷 만듦 이지넷에서 개발한 Toddler eBook 시리즈로 전문 성우가 읽어주는 앱북이다. 동화를 읽어 주는 기능 뿐 아니라 부모님이나 아이가 직접 동화를 녹음 하여 들을 수 있으며, 동화 캐릭..

2월 eBook new Book
2월 eBook new Book 2011/03/09

<이북> 발리홀릭, 신들의 섬에서 노닐다 임진숙 지음 | eStory 펴냄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저자가 발리의 매력을 잊지 못해 다시 ‘신들의 섬’을 찾는다. 발리의 예술촌 우붓에서 민박하며 현지인들과 섞여 발리의 속살을 체험..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Q&A로 푸는 ‘전자책’ ②

서울 서대문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에서 진행한 《홍기빈, 자본주의를 말하다》 미니 강연회 참석자들의 물음표 선택 ⓠ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알기 쉬운 ‘전자책 사용 설명서’를 종합하고자 마련한 ‘독자참여형 전자책 Q&..

지면으로 만나는 ‘전자책 세미나’②

한국전자출판협회 주최 ‘2011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 제안 설명회 출판사와 개발사를 이어주는 ‘애플리케이션’ 다리 한국전자출판협회(회장 최태경)가 중소출판사와 중소개발업체의 협업을 돕고자 제안 설명회를 마련했다. 지난 1월..

엄마의 옷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 밖에서 엄마를 말하면서도 가장 엄마다운 엄마가 부각되는 점은 아이러니다. 박소녀라는 '엄마' 속에 존재하는 '키우는' 유전자는 비단 피붙이들에게만 발휘되는 게 아이었다. 집을 들고 나는 몸뚱이들, 시들어 가는 채마들, 심지어 엄마가 없는 아이들(고아원 후원)에게까지 입술 가까이 밥풀을 붙여 줄만한 실력을 뽐낸다. 더욱이 비릿한 연애의 주인공, 곰소의 사내도 미역국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줘야 하는 모성발휘의 대상이었지 않았나.
 
그러기에 엄마의 상실이 비탄할 만한 것이었고, 극적인 후회와 애통을 위해서 엄마는 부득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탄할 만한 일은 세상의 엄마들이 조금씩은 박소녀를 품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이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끝끝내 '희생'의 면모에 대해서는 거부했지만 백만이 넘는 독자들의 공감 영역에 '희생'을 제외한다면 '엄마 신드롬'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희미해진 감성에 불을 붙이고 톱아보게 한 중심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엄마의 낯선 이름이 아닌 각자의 내면과 상상에서 불러온 '엄마'라는 고유명사였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쯤해선, 지난해 한 작가가 낳았던 '엄마'라는 매끈한 달걀을 깨야할 차례다. 희생과 감내와 침묵과 외사랑이 아닌 질투와 이기와 비난과 강제의 엄마 말이다.
 
어디에 그런 엄마가 있냐고, 뉴스에나 나오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비운의 여인들을 말하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당신의 엄마는 만족스러운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모녀의 관계는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들은 한 쪽으로 기울었을 때 더욱 안정적으로 보인다. 세상의 어떤 관계들은 무게가 달라야 삐걱거림이 없다. '화를 내더라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표명하라'는 육아의 코치는 곰이나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 같기도 하다.



질투와 이기와 강제의 엄마
 
기본적으로 불공정한 관계의 함수가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라는 심리학 서적의 존재 이유다. 전폭적인 지지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반대로 지나친 참견과 관심으로 딸과의 분리를 인정하지 못했을 때, 세상 모든 딸들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부득이하게 시소를 움직이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세상 모든 엄마도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엔 바야흐로 수많은 엄마들이 등장한다. '박소녀 유형'은 제외되는 듯 하다. 하지만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에서도 <엄마를 부탁해> 만큼이나 '나의 엄마'가 쉴새 없이 뛰쳐 나온다.

자신이 받아왔던 외모에 대한 평가 때문에 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삶의 기준을 전달하는 엄마, 결핍에 대한 만족감을 위해 딸을 꼭두각시로 세우는 엄마, 자신과 딸을 일체시켜 딸의 독립을 가로막는 엄마, 주체적이지 못해 중요한 결정들을 남편에게 미루는 엄마, 쓸모있는 순간에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자아상을 형성시킨 엄마.  


딸을 부탁해

이 책이 그런 엄마들의 딸 이야기, 즉 피해자의 심리치료서라고 단정하진 말자. 앞서 괄호 안에서 말했듯이 이 엄마들도 '엄마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를 상상하고 자신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은 <엄마를 부탁해>같은 허구가 보여주는 '내력의 힘'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이해하는 관용을 베풀라는 지시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성급한 공감은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살인을 하게 된 어떤 핍박한 이유들도 범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처럼 '엄마를 이해하기'보다는 행위와 감정들을 제대로 꺼내보자는 취지다. 그런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가 더이상 '자신을 향하는' 바보같은 일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엄마 역시도 할머니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물려받은 것들을 전해줄 가능성이 크다.   

또 이런 증상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접어야 한다. 현재 자신의 편협한 관계망이나 왜곡된 자아상, 자신의 딸을 대하는 불안한 태도들이 거꾸로 엄마를 발견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불행의 모든 연유를 과거나 타인에게서 찾는 것은 어리석지만 그것을 간과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구체적인 치료의 과정들은 불가의 명상 수행법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판단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 하지 말고 이 분노 자체를 느껴봐야 한다. 그러면 분노를 더욱 잘 다스리게 되고,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할지 아니면 아예 표출하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다. 분노는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우리 곁을 계속 맴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더는 분노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

분노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슬픔 역시도 '드러내기, 내버려두기, 밑바닥까지 느껴보기' 단계로 진행하라고 말한다. 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사적 행위들이 과장될수록 진실에서 멀어질 지도 모른다.


엄마옷 벗기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불러온 건 기쁜 일이지만 완벽하게 정형화된 엄마를 통해, 엄마를 급하게 용서하거나 미화할 가능성을 벗겨버리고 싶진 않다. 엄마는 있는 힘껏 자식을 위하지만, 작가가 직접 말했듯이 '그것이 동등하게 엄마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엄마도 누군가의 영향력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배운 '딸'임은, 엄마의 왜곡된 목소리를 죄책감없이 가려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로라 아렌스 퓨어스타인/애플북스/2010.5
엄마를 부탁해/신경숙/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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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집 주변이 오글거립니다. 먼 함성이 창에 불 켜진 여러 집을 합친 건지, 어디 특별 행사장의 모둠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네요. 지금 우리는 이기고 있습니까. 이 새벽에 배달차 소리가 산발적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합니다. 동네에 촘촘한 수비망을 형성한 치킨집 사장님들의 승리군요.  

(그 사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네이버 실시간 중계를 띄워놓고 있었습니다. 작업은 물건너 갑니다)

경기장이 법정이라면 어떨까요. 후반 추가 수혈된 김남일의 지나친 혈기가 실추한 패널티 킥에, 변호사가 고용된다면? 어쨌든 16강 진출이라는 큰 목적을 달성했기에 과실이긴 하지만 치사는 아니었다. 과장없이 변호할 수 있겠습니다. <법정의 고수>에 의한다면 말이죠.

 
<법정의 고수>/신주영/페이퍼로드/2010.6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법이 불행에 둥지를 튼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해집니다. 반대로 '단 한 사람'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행복의 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기도 합니다.     

늘 억울합니다. 차인것도, 탈락한 것도, 주머니가 가벼운 것도 모두 내 탓이 아니길 바랍니다. 교통사고도, 사랑도, 다툼도, 내가 옳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바쁩니다. 내 억울함을 증거할 단서들이 어디든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법정은 철저한 증거주의 입니다. 이의 반대기조인 자유심증주의도 안전장치로 증거능력 안에서 자유심증합니다. 현대의 증명적 사고는 법정과 맞닿아 있는것 같습니다.

좀 더 합리적으로, 단 사진 한 장 이라도, 단 한 줄의 인용이라도, 공인된 인물의 권위를 빌어서 나의 주장을 증명하려는 증거주의 사고가 널리 통용됩니다. 진실이 진실 스스로의 힘으로 드러나는게 아니라 밝혀야만 되는 어떤 주장들 속에서 뒤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부득불 씁쓸한 곳에 사람냄새 물씬 나는 변호사가 떴습니다. 법정을 삶터로 바꿔 씁니다. <법정의 고수>는 법조계의 숨겨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승소와 유불리, 증인, 증거, 판례, 법조항, 날카로운 칼날을 쥔 직업인이 차가운 세상을 비비는 내용입니다. 편하고 재밌습니다. 소설 한 편만큼 잘 읽힙니다. 고민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공격적인 변론서라기보다는 감정적인 탄원서에 가깝습니다.  

법조계의 드라마틱한 성공사례나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사건 보다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교통사고, 이혼, 간통, 사기, 연대보증 같은 평범한 사건들을 다룹니다. 십년차 변호사가 괴나리 봇짐을 이고 떠나는 자아여행 같습니다. 전혀 과장된 몸부림도,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도, 감격스런 현장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속에 잠복되어 있는 보편적인 고민이 법과 만나는 지점이 이상하리만치 다정합니다.  

부모님이 당했던 사기로 노무현, 이성암 변호사를 차례로 만난 어린시절 이야기로 행복한 시동을 겁니다. 돈을 주고 사야하는 변론에 약간의 온도차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후로 줄줄이 이어지는 법정의 사례들은 신주영 변호사(저자)의 보온으로 따숩습니다. 피고와의 적극적인 공감, 연민부터 사법연수생들의 고충, 법조인의 업무환경, 법정 고수들의 역전되는 수, 실패한 변론들, 신나는 승리보다 신명나는 고민들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판사를 설득하려면 판사의 말을 써야한다는 조언처럼 그녀는 독자의 말을 몸으로 익혀 흔들리는 인간의 변호사가 됩니다. 그녀도 세상의 법을 익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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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진 트웬지,키스캠벨/옥당/2010.6


기독교가 오로지 하느님의 눈을 통해서 선과 악을 구분하듯이,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는 나르시시즘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별합니다. 인간이라면 '선과 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나르시시즘이 저를 옭아매고 말았습니다. 일생의 종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떤 강렬한 책들은, 제게 '종교'와도 같은 힘을 발휘합니다.
 
부정하다 수긍하고, 수긍하다 도리질치고, 몸부림치다 온순해지길 반복하면서 동심원으로 중심부에 다가갑니다. 그곳에 실체가 있다면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믿음'인 것처럼(전 무교 입니다), 나의 나르시시즘과 마주앉아 황망합니다. 이곳저곳 어긋나고 줄이 끊어진 삶이 혹여 '나르시시즘' 때문은 아니었나 생채기를 내며 물어봅니다. 

남보다 앞서기를 원하는가.
독특한 것들이 나를 빛낼 것이라 믿는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가.
다른 사람과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더 강조하는가.
유명해지고 싶은가.
나는 나만 사랑하는가.
성과를 자랑하길 즐기는가.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사람을 만난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멋지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뎌졌는가.
아이에게 '너는 특별하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나의 행복은 침해받을 수 없는 것인가. 
돈을 빌려서라도 나를 돋보이게 할 물건을 구입했는가.
날 비난한 사람에게 지나친 적대감을 품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지긋지긋한 두더지처럼 문자를 뚫고 튀어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라고 방망이질을 해도 잠복된 나르시시즘을 완벽히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몇 가지 변명을 해봅니다. 이제 30대, 저는 '겸손의 시대'가 아닌 '자기 PR의 시대'를 걸어왔습니다. '도덕'이 아닌 '상상력, 개성의 모터'가 힘을 발휘하는 곳에 서있습니다. 이웃과 가족이 아닌 '웹'과 '사회적 지위'가 발분하는 소통의 에너지에 휘둘립니다. 더디게 늘거나 급격히 깎여나가는 저금 통장이 아닌 신용카드의 대출이용한도가 더 절대적인 숫자였습니다. 책은 이 모든 상황을 나르시시즘이 창궐하는 증표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겸손을 배울 곳도 많았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론 '겸손'이 성공의 시대에 어울리는 가치는 아니었습니다. '사랑받으려면 나를 드러내라'가 훨씬 솔직하고 당당해 보였죠. '겸손하라'는 권유보다 무서운 나르시시즘에 대한 해부는, 그것을 거의 악성 종양으로 진단하고 적극적으로 파괴할 것을 종용합니다.
 
이 점은 무책임한 사회비판보다 뼈아픈 자아검열을 먼저 요구합니다. 언론과 교육과 웹시대와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나르시시즘을 확산시키고 파멸로 이끄는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결국 '나는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로운가'를 묻게되는 이 책은 좀 잔인할 만큼 단순화 된 경향도 있습니다.
 
자신 안에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개의 현대인으로서 나르시시즘에 의한 인간 분류는 천사와 악마의 구별만큼이나 선명하면서도, 한편 의심스럽습니다. 예뻐지고 싶은 욕구,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욕구, 나와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천부권, 엣지있고 핫하고 쿨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유혹, 등이 모두 나르시시즘에 의해 발현된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이마에 거울을 하나씩 달고 있는 자아기계라도 되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 블로그만해도 독후라는 미명 아래 '나'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은 아닌지, 어제도 잔소리를 퍼부은 시어머니가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나르시스트는 아닌지, 방어기제로 적개심을 품은 제가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에 이미 전염된 건 아닌지, 자기 얘길 하기 좋아하는 옆집 할머니도 유사한 증상인지, 꾸미길 좋아하는 남편도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경계대상은 아닐지, 갑자기 '나르시시즘'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일상을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책은 수많은 처방전을 내놓는데, 그 중 나르시스트들을 격리 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한 되도록 얽히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합니다. '친밀하게 굴되 친구가 되지는 마라''그들과 주고받은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해두어라. 상황이 나빠지면 뒤통수를 칠 나르시스트와 대적할 때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이 처방은 이 책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나르시스트들의 위험도에 얼마나 증오에 가까운 판결을 내리고 있는지를 알게합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악마처럼 분명 나르시시즘도 한 자리 차지할 것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완벽한-경계할만한- 나르시스트의 모델이 과연 존재하겠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성형녀, 방송에 자주 노출되는 유명인, 라이프 스타일의 잡지들, 총기 살해자, 천부권자, 독특한 이름을 짓는 부모들, 자기계발서 속에 나르시시즘의 징후는 분명히 있지만 그들을 '나스시시스트'로 못박고 벌하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책이 권하는 처방전은 '나'에게 만큼은 '나르시시즘이 없다'는 전제하에만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방어하고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나르시시스트라고 찍은 낙인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위험한가요. 나르시시즘은 존재할 망정 나르시시스트는 없다고 반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 순화되어 해석해야할 것 같습니다. 강경한 어조를 조금 포기했다면 더욱 지적인 목소리가 될 수 있었음에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하지만 산발적이면서도 소중한 아래의 구절들은 이 책을 빛나게 만듭니다. 이런 주장은 나르시시즘의 반대편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돕고, 서구의 자아비판을 통해 동양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이끌기도 합니다.          

*저축을 하는 것에 더 많은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신용도가 아닌)
*나르시시즘과 자존감에는 차이가 있다. 아이에게는 '특별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저 수학을 잘한다고 말해주면 된다.
*우리는 모두 독특한 존재이지만, 공통적인 경험과 도전과 특성을 나눠 갖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자신을 너무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할 몫을 남겨놓지 않게 된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야 한다.
*'미래에 우리는 모두 15분 동안은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앤디 워홀의 말-유명해지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들립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빚은 숨기지만, 그들이 소유한 재산이나 물건은 절대로 숨기지 않는다. 
*전통적인 불교에서 나온 개념이기도 한 '깨달음'은 나르시시즘을 줄이고 자아를 얌전하게 하는 한 방법이다. 
*아이들에게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가르칠 수 있다면, 나르시시즘적인 공격성에 대한 잠재적 치료제를 얻게 될 것이다.(아이에게 동감과 동정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라)  
*학문적으로 우리는 '실패를 배우는'것이 '네가 특별하다'는 메시지보다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독서 후, 우연찮게 제가 살고 있는 도시의 시민헌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르시시즘의 국가적 각인인가요.


시민헌장 1.부지런하고 알뜰히 하여 남보다 앞서는 시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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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퀴즈 하나 냅니다.

들에 단을 쌓고 법회를 여는 것을 뜻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시긴 전) 마지막으로 제자인 마하가섭에게 정법을 전수하면서 영취산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석가모니가 갑자기 설법을 중단하고 대중을 향해 연꽃을 들자 어리둥절해하는 대중들 사이로 가섭만이 이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던 '염화시중의 미소'도 이 곳에서 탄생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어지럽고 떠들썩한 상황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무엇일까요?



<10대와 통하는 불교>, 청소년을 위한 교양 도서의 냄새가 납니다. 아쉽군요. <당신과 통하는 불교>라고 고쳐부릅니다. 모두가 읽기에 모자람이 없는 책입니다. 대게 쉽게 읽히려는 인물전이나 종교서들이 '일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인데 교훈이나 정설을 언급하기보다, 쉽게 풀어 쓴 말로 동심원을 그리며 불교의 핵심을 향해 갑니다. 고민거리도 던져주고 보다 넓은 시야로 불교를 보도록 끌어올립니다. 타겟을 지정한 책이긴 하지만 타겟을 벗어나도 즐거울 책입니다.

각 꼭지의 끝에, 궁금하지만 어떤 책도 가르쳐주지 않을 것같은 질문들이 모여있는데 '불교 신자들도 일요일마다 절에 가야 하나요?'에는 적절한 답문 뒤에 김규항의 <교회>란 글을 덧붙입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아이가 경기라도 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교회에는 예수대신 맞춤식 예수 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 년에 한 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 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일요일에 법회를 열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경전 공부를 하는 사찰이 많이 늘긴했지만, 교회에서만 예수를 만나는 '교회 기독교'의 괴리를 불교가 답습해서는 안되겠다는 바깥 의지가 생기더군요. 즉시 마음에 품는 순간, 예수와 부처의 삶을 몸으로 쓰는 순간이 '종교를 믿는다'는 행위의 시발점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을 도출한 본문에서 이미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입신 출세나 함격, 부모님의 건강이나 남편의 사업을 위해서 절에 들락거리는 '보살' 아주머니들을 과연 이타적인 서원을 세운 보살이라 물러야 할까요? 또, 마치 절을 법당의 주인이양 행세하면서 관광객들과 일반 신도들의 법당내에서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사납게 눈을 부라리다, 누군가 축원과 재를 지내기 위해 시주를 한다고 하면 상냥한 얼굴로 돌변하는 법당보살들도 과연 '보살'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존재들일까요? 어쩌면 이시대의 보살은 절 안이 아니라 절 밖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10대와 통하는 불교>에서

호기심을 가장하는 질문이 그 깊이를 더해갈 때, 부도전 앞의 연못에 무심결 얼굴을 비추다가 석가산의 봉우리를 마주하는 격입니다.
 
이쯤에서 두 번째 퀴즈 나갑니다. 

옛날에 게으른 승려가 있었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수행과 정진을 게을리하다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승려는 그 과보로 죽은 뒤 이것의 몸으로 환생하여 살게 되었는데 등 위에 나무가 솟아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스승을 보게되어 반갑고 서러운 마음에 스승 앞으로 가 눈물만 뚝뚝 흘렸습니다. 이것의 전생을 살펴본 스승은 자신의 제자였음을 알고 천도재를 지내니, 제자가 꿈에 나타나 수행승들이 자기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나무로 이것 모양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스님들이 목탁을 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에서 발췌       
        
    
저도 그제야 목탁이 이것 모양을 무척 귀엽게 닮았다는 사실에 무릎을 칩니다. 이것 말고도 절로 신명이 나게하는 사물놀이의 네 가지 악기가 불교의 사물로부터 연원된 사실도 뒤 쪽에 나옵니다. 예불에 이용하는 사물, 즉 목어, 운판, 북, 범종이 북, 장구,꽹과리, 징과 짝을 이뤄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불교의 수행도구 하나하나가 교리의 상징성을 닮고 있다는 사실 또한 종교의 깊이를 재는데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점 하나를 찍고 시작하는 두 번째 꼭지는 인상적입니다. 현대 수학에서의 점, 선, 면의 서술이 불교의 연기법과 상통합니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도 있고, 이것이 생기니 저것도 생기고, 이것이 없기에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니 저것도 사라진다."의 상호관계가 점이 없으면 선을 말할 수 없고, 선이 없으면 점을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것은 바닥을 걷는 발바닥이 바닥과 하나이면 걸을 수 없고, 둘이면 디딜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점 하나로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를 설득하기도 합니다. 

이 책의 클라이막스는 '세기의 라이벌들'이라는 타이틀로 이순신과 원균의 째째한 신경전에 대해 입을 떼며 시작합니다. 석가모니vs데바닷타, 아난vs가섭, 원효vs의상, 지눌vs성철이라는 대결구도는 불교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톱아보게 하는 빅매치입니다. 무엇보다 세심한 '세심사 가는길'이라는 마지막 꼭지는 절에 가서 남모르게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하기에 좋았습니다. 세심사라는 가상절을 마련해서 절간의 초입부터 앞뜰과 뒷뜰을 샅샅히 뒤져보며, 일주문, 사대천왕, 비로전, 대웅전 등등에 새겨진 의미를 숙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 마지막 퀴즈 나갑니다.
예불에 사용되는 사물 중 구름모양의 운판은 사물놀이의 무엇이 되었을까요?

충동적으로 퀴즈를 내고 나니, 그냥 넘어가긴 심심하단 생각이 들어 경품을 내걸기로 합니다. 제가 읽었거나 읽지 않은 열두 권의 책을 세 권씩, 네 분께 나눠드립니다. 답은 맞아도 좋고 틀려도 좋습니다. 어떤 답도 답으로 읽어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답 비슷한 것만 남겨서 댓글을 달아주세요. 원하시는 책을 세 권씩 골라서요. 댓글 순으로 나눠드리게 되겠네요. 앞에 분이 먼저 고르신 책이 있다면 뒷 분은 다른 책을 세 권 골라주세요. 주소는 방명록에 비밀글로 남겨주시구요. 받은 책 못읽었으니 택배비도 쏘겠습니다. 부끄러워 마시고 서두르세요. 바람처럼 다녀가시는 분들도 이참에 알고 지냅시다.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와 2001+5는 애니북스의 만화.
고스트 라디오와 리큐에게 물어봐는 문학동네의 소설, 
차근차근 가치육아, 아이언어성장 프로젝트, 칭찬은 아기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서평 보실 수 있습니다.       

 

<10대와 통하는 불교>/강호진/철수와영희/2010.5

이 책이 소개한 다른 책들, 출판사 <철수와영희>의 다른 책들



(<길은 복잡하지 않다>서평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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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브레인>/샹커 베단텀/초록물고기/2010.5


무의식적 편향

오로지 문학 장르에서만 '책'이란 걸 발견해왔다. 문학의 감수성과 직관과, 문학이 주는 영감과 공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독서는 순탄했다. 고전이라는 난항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불구의 독서를 자각하게 된 건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거의 최근에야 인문서를 조금씩 집어들게 되었고 지금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듯 힘겨워 하고있다. <히든 블레인>의 샹커 베단텀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류(潮流)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겠는가?'

몸의 어딘가가 아플 때에야 비로소 몸의 부위를 또렷히 의식하게 된다. 그제야 몸에 대해 갖은 아양과 겸손을 떨며 몸을 보살피고,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날 밀어내는 물살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문학 이외의 장르에 거의 손을 뻗지 않았는가. 문이건 마음이건 생각이건 열려 있어야 함을 이성적으로 판단했던 내가 왜 독서의 편향을 막지 못했는가. 아무도 '다른 책은 읽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책'에 한에서 만큼은 확짝 열려 있었다고 확신했을까. 

상커 베단텀이 말한 '숨겨진 뇌'의 무의식적 편향은 이렇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아주 작은 힘이지만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작용은 생각의 흐름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섭

초보 입문자 답게 '인문'이 가진 교양이나 지식이 '예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로 인문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자연히 '통섭'의 책들이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고, 나아가 '문학'의 재미를 능가하기도 했다. 독서법을 지도하는 <독서의 즐거움>에서는 아얘 '통섭의 책을 읽는다'는 꼭지를 통해 최재천 교수의 <지식의 통섭>을 중심으로 <프로메테우스 인간의 영혼을 훔치다><문학으로 역사읽기, 역사로 문학읽기><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등등을 소개한다. 

대중문화로 철학하고, 문학으로 과학하고, 그림으로 음악을 듣는 일은 흩어진 지식들을 그러모아 적소에 배치하는 실용성을 띈다. 소재에도 한정이 없는만큼 지식의 확장에도 한몫한다. 인문학과 함께 부상한 '통섭'이란 이슈는 독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렵고도 반가운 손님이다.

<히든 브레인>을 펼쳤을 때 이 책이 소설적 기법으로 심리학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았다. 논제 안에 예시가 포함된 형태가 아니라 사건을 축으로 논리를 드러내는 식이다. 그 분량의 분배 못지 않게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소설적 구성이 이야기 자체로 의미있다. 테러리즘, 성폭행, 살인, 치매, 정치 이야기가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어 '논픽션'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술되기에 이론이 방해받는 법은 없다. '천부적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상커 베단텀을 통해 논픽션과 심리학이 만난 지점에 선다.

..(숨겨진 뇌의 역할을 과장해서)윌에게는 숨겨진 뇌만 있다고 가정해보자. 윌을 사무실을 환하게 만드는 미소를 가진 영리하고 잘생긴 젊은이로 보는 대신, 웹(네트워크)의 중심점이라고 상상해보자. 그 중심으로부터 관계의 선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뇌로부터 나온 가는 실 하나가 그가 성장했고 부모가 지금도 살고 있는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로 흘러간다. 또 하나의 가는 실이 가톨릭 사제인 그의 형이 살고 있는 인디애나 주의 사우스벤드로 향한다. ... 윌이 가는 곳이 어디든 새로운 케이블들이 사방으로 싹튼다. ...어떤 케이블은 윌이 직장으로 가면서 모르는 누군가를 스쳐지나감에 따라 순식간에 생겨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책에서

9.11테러 현장의 89층에 있었던 한 직원의 하루를 의도적 발상으로 쫓는 이 광경은, 관계망의 역학과 집단심리, 숨겨진 뇌가 어떻게 윌의 행불행을 나누었는지를 긴박하게 보여준다. 무척 특수하고 극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절제된 묘사를 통해, 평상시의 위기나 사소한 위험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식으로 도피하고 대응하는지 충분히 병치시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되었다. 저자가 의도한 바 아주 개인적인 사례에서부터 살인, 테러리즘, 정치로 동심원처럼 확장하고 있는 숨겨진 뇌의 작용들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숨겨진 뇌   

나는 왜 위기 속에서 집단의 동의를 얻길 원하는가. 아이에게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눈썹 짙은 외국인 노동자가 다가오면 가슴이 움찔하는가.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보이는 동정은 왜 매일같이 굶주려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향하지 못하는가. 나는 왜 응원해 마지않을 친구에게 속좁은 질투심을 느끼는가.

이전엔 의심의 여지도 없었던, 어쩌면 더 생각하기 싫은 질문들이었지만 '숨겨진 뇌'의 존재는 이 무형의 감정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숨겨진 뇌는 절대 우리의 재능을 능가해 똑똑함을 발휘한다든가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주는 새로운 능력자가 아니다.

의식적인 마음은 합리적이며, 신중하고, 분석적이지만 숨겨진 뇌는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들을 하기 위해 마음의 지름길을 잘 이용한다. 의식적 뇌는 느리고 신중하지만, 숨겨진 뇌는 빠르게 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숨겨진 뇌는 속도을 얻기 위해 정교함을 희생한다. 숨겨진 뇌는 간결하지만, 예리하지는 못하다. 숨겨진 뇌는 우리를 세계에 신속하게 동화시키고, 우리가 빠른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련의 간결한 도구들을 준다. (책에서 정리)  
 
숨겨진 뇌의 이런 행동방식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성적인 판단을 거스르면서까지 세상과 단절된 터널을 유의미하게 통과할 수도 있다. 물론 그 터널 안에서는 터널밖의 규범이 이단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불합리한게 뻔한 다단계 판매나 사이비 종교 집단에 편입되는 것 또한 '숨겨진 뇌'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실은 전혀 이상하거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경험할 때, 그들을 '미치광이'로 부르는 건 그들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다. '숨겨진 뇌'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7과 1/2층 같았다. 

오히려 '우리는 왜 의식적인 뇌가 있을까.'라고 묻고 있는 이 지적이면서 감수성 넘치는 책에 대한 호평 대신 <히든 브레인>의 마지막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 책은 합리적 마음이 얼마나 숨겨진 뇌의 교묘한 책략을 감당해내기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또 이성이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보루라고 주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성은 우리의 등대이며, 우리의 구명조끼이다. 이성은 양심의 목소리이다. 그게 아니면, 양심의 목소리여야만 한다.   


숨겨진 뇌와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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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사의 문고본으로 나온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애타게 찾아봤지만 역시 사라지고 없네요.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를 말하기 위해선 '무소유'에 대한 확인이 필요할텐데 말이죠. 아쉬우나마 몇 주전 도착한 김세중의 <무소유>를 펼쳤습니다.
 
어쩌면 이보다 좋은 대거리도 없겠습니다. 불교, 즉 붓다가 설파했다는 '무소유'가 종교계나 종교의 시혜를 입고 있는 대중에게 어떤 가치로 변모되었는지 확인하는 것 말입니다. <무소유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불교의 교리가 주관적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온 몸으로 말합니다. 김세중의 <무소유>가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에게서 빌려온 가치들은 대게가 '물질적 소유'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스님이 얼만큼 청빈하고 숭고하신 삶을 살다가셨는지 어림짐작 합니다. 편생 한 벌의 누더기와 고무신으로 삶을 축약했던 성철 스님, 방에 남은 것이라곤 순수함을 일깨우는 <어린왕자>같은 책들 뿐이었다는 법정 스님. 저자 김세중은 '적당한 소유와 알맞을 정도의 욕망을 누리면서는 결코 진리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음'을 스님들의 삶으로써 몸소 보여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붓다가 '적당한 소유와 알맞을 정도의 욕망'을 재가자(출가를 하지 않고 일상 생활을 하면서 불교를 믿는 신도)에게 가르치려 했음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재가자들을 위한 부귀영화!와 지혜,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두 스님의 고행은 존경해마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닮을 수도 없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산중의 절간처럼 우리의 마음을 적막하게 했습니다. 김세중처럼 '소유할 것과 나눠야 할 것을 구분하며 살아야 한다'는 적당한 교훈을 도출해 내는 것이 대게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문화적 필터를 벗겨낸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는 잘 소유하는 것과 욕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고 있습니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까지 빌려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려 하고, 극단적으로는 '부자가 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인식을 재확산 하고 있는 김세중의 <무소유>는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와 대척점에 있어 보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선하고 신성한 것일지언정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은 '부'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붓다조차 교단의 존속이 신도들의 경제적 번영에 달렸던 만큼, 신도들에게 세속적 성공의 길을 불교 교리과 접목시키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또 하나의 뿌리 깊은 오해는 붓다가 속세의 행복(예를들면 오욕락)을 거세하거나 부정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붓다는 '영적인 행복'이 더 좋다고는 했을지언정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은 신도들에게 그것을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아얘 그들을 위한 설법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은 '출가 하려는 신도'들에게는 매우 중대했으므로, 붓다의 설법을 보존한 그들이 자신들에게 유용한 내용을 기록하여 보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만나야 할 중도의 설법, 즉 중생을 위한 가르침은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불교로 만날 수 없었던 '성공과 행복'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있어 보입니다.               

책 속에서 붓다의 세련됨을 만납니다.

하인의 복지
힘과 능력에 맞는 일을 맡겨라/합당한 임금을 지급하고/병들면 치료해주고/좋은 음식을 제공하며/ 재때에 일손을 놓을 수 있도록 하라.

수입의 사분법
붓다는 수입을 네 등분하여 쓰라고 권장했다. 반은 투자하고 사분의 일은 저축하며, 나머지 사분의 일로 생활하라는 "사분법"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붓다는 사람들이 보시나 소비로 재산을 다 날려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붓다는 저축을 중시했는데 '저축은 예기치 못한 비국이나 불운이 생겼을 때 쓸 수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지켜야 할 다섯가지 덕목
아내를 존중하라.(여성의 권리와 존엄성이 완전히 무시되던 시대였음에도)
아내에게 상처주는 말은 삼가라
아내 이외의 여인을 유혹하지 마라
아내에게 권위를 주어라
미를 추구하는 마음을 존중하라 
                  -오늘 당장 남편에게 불교의 교리를 설법해야겠군요!

설득의 기술
오늘날 사용되는 설득기술은 주로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슬픈 일을 경험한 사람과의 대화에서 우선 이야기를 잘 들어준 후 "정말 힘드셨죠"라고 말하라는 식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보다 심오하다. 말을 할 때는 그 말의 내용과 일치하는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코칭 육아의 진심어린 기술이군요!  

소통
민감한 주제를 놓고 논쟁하지 마라(형이상학적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느니 한발 물러나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쪽이 훨씬 의미있다)
결점을 못 고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줘라
평화로운 결별을 선택해야 하는 때도 있다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바스나고다 라훌라/아이비북스/2010.4
<무소유>/김세중/휘닉스/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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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정제원/베이직북스/2010.4

서문에서도 언급했지만, 독서법에 관한 책이면서 이렇듯 책을 구체적으로 선정해 일독을 권하는 것은, 독서법만 알고 실제로 그 독서법에 맞춰 독서 할 줄 모르는 병폐를 없애기 위해서다. 훌륭한 독서법은 행위 밖에서 관념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독서 행위 내부에서 우리에게 현시될 뿐이다.

정확히 이 구절이 서문을 포함해 큰 꼭지마다 네 번 반복됩니다. 뻣뻣하고 지루합니다. 진지한데다 관념적입니다. (요샌 목사들도 안그럽니다) 저자 정제원은 구닥다리 입니다. 

언제부턴가 책 가리는 게 제 소양이 아닌지라 어디한 번 읽어보자고 덤벼들었습니다. 의외로 책장은 술술 잘 넘어갑니다. 매 쪽마다 언급되는 책 목록은 헤프게 지나칠 수도 없었습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람이 돈맛도 안다고, 책도 읽을수록 열을 올리게 되있습니다. 요즘 제 독서 시속은 아우토반 입니다. 강한 걸로 넣어주세요, 책에 대고 이런 섹슈얼을 강요하는 중입니다.

도무지 예의라곤 없는 제 질주에 무인 감시카메라가 나타났습니다. 참 구식대로, 독서법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맨 먼저 들고 나오는, 전쟁터에서 평화를 무기로 싸울만한 못말리는 '학도'가 <독서의 즐거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의 테마에는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책을 읽는다/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는다/같은 테마의 책을 읽는다/같은 번역자의 책을 읽는다. /같은 '이즘'류의 책을 읽는다/같은 출판사 혹은 같은 시리즈물의 책을 읽는다/정치·사회분야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읽는다/두껍고 난해한 책에 도전한다/과거에 읽은 책 중 인상 깊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이런 숙제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한 학기 강의 계획서 같네요. 물론 교수님이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수업은 알찹니다. 좋은 책들에 대한 경외는 망설임 없이, 자신없는 주장은 한발 빼는 겸손으로, 말쑥한 영혼의 그림자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화려한 언변을 뒤로 하고 시대의 독서 교양을 고집하는 학자의 성역을 오롯히 지켜내시는 군요. 

곧 '지식을 어떻게 확장하는 가' '작가는 누구인가'의 다른 테마로 30가지의 독서전략이 등장합니다. 그의 30주 커리큘럼은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책갈피마냥 평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일목요연한 흐름으로 정리되니 한 사람의 올곧은 독서세계를 맛 볼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선입니다. 한 질의 책 꽂이가 어떤 실제적인 방식으로 채워져있는 지 눈으로 보는 야릇한 현장성도 가집니다. 무엇보다 독서법으로 예시하는 책들이 하나같이 읽어보고 싶어 못견디겠다는 것이지요. 

(제가 고른 책입니다. <지식인을 위한 교양 브런치><헬렌 켈러 자서전><이것이 세상이다><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나무열전><누들 로드><철학 에세이><반룬의 예술사>)

저는 '일독'을 권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가 권하는 '일독'에는 머리 굵어진 사람의 수수한 지적 갈망과 시대를 놓치지 말아야할 지식인의 자세와, 치우침 없이 책을 고르려는 겸허함이 들어있습니다. 지나친 책 소개에 할애하는 일이 없어 독서전략의 흐름을 끊지 않는 다는 점이 속도감을 줍니다. 각 수업 사이의 '독서공감'으로 그 내용을 첨부하려는 친절함이 엿보이지만 실은 인상적인 평은 없었습니다. 

서울 토박이 들이건 서울로 올라온 지방 사람들이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가?"하는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갖기 바란다.

<이것이 세상이다>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 신천지에서 들려오는 유익한 정보, 그리고 그 정보를 설명하는 창의적 서술방법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얼마나 광대무변한지를! 굉장한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의 인생을 뒤바꿔줄 수도 있을 것 같이 포장된 허섭쓰레기들에 비해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문화사'라면 껌뻑 넘어간다는 저자, 때론 지적으로 때로는 감상적으로, 수를 모르는 사람의 투박한 직설이 난무하지만, 열거한 책들에 대한 이정표 역할 밖에는 못했다해도, <독서의 즐거움>이 흐트러지지 않는 독서법의 기준이 될 것임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수업을 잠시 따라가 볼까요?


상처받은 우리의 영혼을 위무하고, "나 자신은 누구인가?"하고 당당히 물을 수 있는 용기도 얻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물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이는 우리가 정치.사회 분야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혹은 신간에 관심을 갖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쉬운책만 읽어서야, 독서가로 성장할 수 없다. 책읽기도 도전이다. 리하르트 다비드 프레히트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생각보다 충분히 많은 책을 이미 읽었다. 먼 곳에서 책을 찾지 말자. 헬렌 켈러<헬렌 켈러 자서전>→
지식은 잡학 상식을 굴리고 굴려 만든 눈사람과 같다. 잡학 상식은 힘이 세다. 피에르 제르마<이것이 세상이다>→
'구미가 당기는 책'은 결코 엉터리 기준이 아니다. 책을 고르는 능력은 직감일 때도 많다. 그 직감을 키워 나가야 한다. 스튜어트 리 앨런 <커피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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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정재승의 도전 무한지식>/정재승,전희주/달/2010.4


잡학 상식 책에 대해 실은 조금 폄하했다. 큰 몰입이 어렵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물건만 발명한다는 괴짜 발명가처럼(이것도 책의 꼭지 중 하난데, 생선 눈가리개나 횡단보도가 그려진 커다란 휴대용 그림같은 걸 발명한 일본인이다)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일본인의 발명 철학은 발명품을 팔지도, 특허 내지도, 독점계약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책이라해도 지적 실용성을 먼저 따지는 내게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 책(발명품)을 읽어라(만들어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간만 잡아먹는 책'인지 아닌지 계산기를 먼저 두드려야 성의껏 몰입할 수 있는 영악함에 대한 비틀기였다. 

'잡학 상식 책'에 대한 편견 깨기는 이 책과 엉뚱한 발명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이어 고른 <독서의 즐거움>의 독서전략11에서는 지식을 확장하는 첫 번째 관문으로 잡학 상식의 힘을 말했다. 요행히도 정재승의 <도전 무한 지식>이 '재미있는 사고가 아니라 도전하는 사색으로 우리의 뇌를 인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간단히 소개되어 있기도 했다.
 
도전하는 사색까지야 무리수이지 않나 싶었지만 '쓸데는 있겠지만 절실하지 않았던' 지식들이 긴장을 풀고 즐길만 하다는 사실을 <도전 무한지식>이 보여준다. '잡학'만큼 책 사이의 징검다리를 놓기에 적절한 디딤돌도 없고, <천하무적 잡학사전>의 서문처럼 '누구든 붙잡고 침을 튀기며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고' 사소한 궁금증에 대한 해갈에 '무릎을 치며 기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독서의 즐거움>의 저자처럼 잡학 상식을 모은 책들이 그다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야말로 잡다한 상식들을 엄선하는 작업은 결코 아마추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기야 우리에겐 절대 절명의 순간의 구원수인 검색창이 커서를 끔뻑거리며 키워드 자동 완성까지 해주고 있으니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책의 소견은 좁기도 하다. 웹은 동시다발적으로 상반된 견해와 과거와 현재를 브리핑해주는데 말이다. 그래도 즐거웠다. 궁금해서 읽는 게 아니라 '궁금했구나' 깨닫는 과정이 나를 환기 시킨다. 누구에게 묻기도 멋쩍은 사소한 질문들이 묻지도 않았지만 답을 해준다. 

책 속에서
 
이를테면 '달은 왜 항상 나를 따라다닐까'는 아이가 언젠가 물어올 질문임을 직감했다. 졸기만했던 과학수업을 애써 쥐어짜야봐야 결국 아이는 궁금증도 풀지 못하고 엄마의 횡설수설만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과학 상식의 이 피폐함이여!) 하지만 이젠 당당히 말하리라. 달과 지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의 움직임은 사실 매우 미미하다고. 그래도 아이가 묻기 전에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서영아 달이 자꾸 우리를 따라오네?'라고 능청을 떨 것이다. 

'요게 궁금했구나'느꼈던 지식은 겨울이면 나무기둥에 두르는 '잠복소'였다. 보온이 아닌 해충 박멸을 위한 지혜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명칭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그 효과에 대한 의문으로 해충이 좋아하는 유인제를 숨긴 잠복소를 둘러 방충효과를 기대하기도 한다니, 우리동네가 관습적인 잠복소로 혈세낭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시청에 여쭈어야겠다.
 
'누구든 붙잡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 해주고 싶은' 꼭지는 

생쥐는 원래 치즈에 열광하지 않는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는 노하우.-바위를 가장 강력한 무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보를 내는 사람이 많아지고 결국 가위를 내면 승률이 높아진다 
충전식 배터리, 이렇게 하면 오래 쓴다.-니켈 배터리는 완전 충전, 완전 방전이 배터리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좋았지만 최근 리튬 배터리는 수시로 충전하는 것이 배터리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효과적이다.
친환경 시체 매장법.

이다. 

이밖에도 얕지 않은 환경-과학 지식들이 실로 사색을 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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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사과가 가르쳐준 것>/기무라 아키노리/김영사/2010.4


접고 또 접었습니다. 망설임없이 책의 모퉁이를 접어댔습니다. 결국 216페이지의 반은 접혔군요. 자, 그럼 이제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아. 다시 독서를 시작해야겠군요. (접은 부분을 늘 새로 읽습니다) 뉴턴이 <기하학>을 읽은 것처럼, 꼬마 신랑이 반짝이는 눈으로 연지곤지 찍은 새색시를 바라볼 때처럼, 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으려면 접은 부분을 다시 읽는 수 밖에요. 

<사과가 가르쳐준 것>. 기무라 아키노리는 유물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는 화석일지도 모릅니다. 10년동안 사과를 수확하지 못한 농부가 캬바레에서 밤일을 하다가 야쿠자의 싸움에 휘말려 부러진 이빨을 훈장처럼 남겼다가 결국 몽창 빠져버렸다고 하니 뼈말고, 살만 남은 화석이군요. (사진출처)

글쎄 10년 동안 사과는 안따고 뭘했냐구요? 그 사람 농부 맞냐구요? 자연을 일구는 농부, 아닙니다. 자연을 사색하는 철학잡니다. 10년동안 자연을 탐구해서 뉴턴의 사과나무 한 알을 건져낸 과학잡니다. 

과학자면 뭐하고 철학자면 뭐합니까. 본업은 농부고 딸래미는 "우리 아버지는 사과를 키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기른 사과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숙제에 폭로하는 걸요. 농약 없이, 제초 없이, 비료 없이 자연이 10년 후 선물한 사과라구요? 아니요. 기우제가 불러온 비같습니다. 인간의 소원이 불러온 환영같습니다.

6년 동안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지 않았다면 그것도 겨우 한 두 알로 시작됐다면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이길 포기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기무라씨도 밧줄을 들고 농부이길, 아버지이길 포기하려고 산 속에 들어갔습니다. 나무가지 위로 던진 밧줄은 스르륵 떨어집니다. 그것도 산 속의 사과 나무 아래에요.

이쯤되면 인간의 주술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 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고집스런 농부의 목숨을 건진 사과나무는 물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데도 고색창연하게 아름답습니다. 흙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꼭 쥐면 잡히고 놓으면 포슬포슬 흩어집니다. 뭐가 좋은 흙인지는 몰라도 좋은 흙은 이럴거란 확신이 듭니다. 자연의 고집과 아량은 상당한 유연성을 발휘합니다. 

무농약 결심을 하고 백방으로 안 해본 것 없는 시도를 했지만 사과나무는 말이 없었고 죽음을 목전에 둔 기무라씨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사과알 말고 사과밭의 흙이 건강해지길 기다려야 합니다. 흙이 건강해 지려면 '자연 상태' 즉,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가까운 진리를 획득합니다. 이걸 '자연 재배'라고 이름합니다.     

<자연달력 제철밥상>에서 '자연재배'법에 얼핏 감흥이 왔습니다. 도쿠노가진의 <무농약 건강채소 기르기>에 "대부분의 충해는 화학비료나 덜 발효된 퇴비가 발효될 때 나오는 화학물질, 그리고 잡초를 뿌리째 뽑아내는 데서 발생한다. 질소비료 과용으로 진디물이 생기고, 덜 발효된 퇴비로 배추벌레 풍뎅이가 생기는 것은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라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누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과는 채소에 비할게 못됩니다. 손이 제일 많이 가고 약을 제일 많이 친다는 사과는 저자의 다른 책 <기적의 사과>의 말마따나 '기적' 입니다. 썩지않고 시들기만 한다는 사과도 기적이지만 이 농부야 말로 기적입니다. 쌀 한 톨로 상징되던 농부의 땀에 감히 질책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쌀 한톨과 대화하는 기무라 아키노리 일겁니다.

그럼 그의 노하우를 적극 수용해서 그냥 내버려두면 다 잘 되는 거 아니냐구요? 잡초도, 해충과 익충의 구별도 없애고 사과밭을 원시림으로 놔두면, 아담과 이브가 깨물었던 사과를 먹고 우리가 이번 만큼은 진짜! 부끄러워하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꼭 그런건 아닙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의 심부름꾼이 되라는게 그의 철학이지만, 사과밭에 무성한 잡초도 일년에 한 번은 이발을 해주어야 한답니다. 척박한 땅에 비료 대신 콩씨를 뿌리랍니다. 아얘 잡초를 구해서 다양한 잡초 컬렉션을 만들랍니다. 사과나무와 담소하랍니다.
 
다양한 노하우까지야 구하는 사람에게만 유용하겠지요. 하지만 그 사과가 우리가 먹을 게 분명하다면, 우리 아이들이 밟을 땅이 확실하다면, 이건 기술이 아니라 가치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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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내 책 쓰는 글쓰기>/명로진/바다출판사/2010.4


글쓰기 책을 보면서 낄낄댔습니다. 블로그에 아얘 딴 살림을 차린 제게 작법 책은 교과서만큼 진지하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오규원의 <현대 시작법>도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도 안도현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도 <맛있는 글쓰기의 길잡이>도 유익한 참고서였지만 당장 손가락 관절에 펜을 쥐어 줄만큼 강력한 동기부여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문청시절 읽었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개중 가장 뼛속을 후볐던 기억이 납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아직 읽지 못한게 아쉽긴 하지만 <내 책 쓰는 글쓰기>만의 특별 것저리는 어디에도 없을것입니다.  

마치 달리기 주자가 출발선에서 신호총 소리를 들은 자동반사적 시점 같았다고나 할까요. 저는 들썩거렸습니다. 제게 뛰쳐나가지 않고는 못베길 만큼 시공간의 정적을 깨는 단발이었습니다. <내 책 쓰는 글쓰기>의 비법들은 모두 살을 부데끼고 나온 것 같았습니다. 종이와 펜, 모니터와 자판 사이 보다 밀착된. 폼도 없고 겸손도 없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걸(그게 모든 비법은 아닐지라도) 전수하겠다는 봉사정신이 심금을 울립니다. (이 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사이긴 해도)


인디라이터


여기에는 있지만 다른 책에는 없는 것 중 하나는, 쓰기부터 출판 후 A/S까지의 과정을 시원스럽게 내다볼 수 있다는 거죠. 저자가 살사책을 완성하기 위해 살사의 고향 쿠바에 다녀와서 적잖이 딴지거는 인물에게 '쿠바에선 그렇게 안추거든?'이라고 했던 말이 '내 책에는 다른 책에 없는 뭔가가 있거든?'이라고 들립니다.  

예문도 많고 반면교사도 있고 책을 내본 사람의 충고와 가르쳐본 사람의 경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책에는 없는(100% 확신할 순 없지만) 날개 프로필 쓰기, 기획안 돌리기, 출판사와 컨텍하기, 가장 중요한 '인디 라이터', 즉 상업적인 글쓰기에 대한 독려가 있습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대우받는 시대가 갔다는 통찰은 서글프기도 하지만 여태껏 외면하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전 여전히 작가들의 고루한 사색을, 난해한 요구를 기꺼이 감내하는 편입니다. 베스트셀러같은 최전방은 아닐지라도 지독한 고통의 허기로 불러들이는 극단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세계가, 보존되어야 할 유물이라는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등단문인 신춘문예로 당선된 소설가들의 월 평균 수입이 100만원이라해도, 오히려 그런 이유로 더더욱 문학에의 애착은 강해져만 갑니다. 말하자면 저는 난생처음 '인디라이터'의 세계에 눈을 돌렸습니다. 지지부진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나 손보면서 재능없음을 한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정말 멋지게 한 방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작법이 작법


<내 책 쓰는 글쓰기>. 사실 이 책 한 권이 스스로의 이론들을 집약한 표본입니다. 

모욕과 치욕의 순간을 글로써라. 입사원서 접수만 100번 했다고? 265번을 채워라 그리고 <365일 만에 취업 성공하기>로 책을 내라.

저자는 책에 자신의 모욕과 치욕의 순간을 빼놓지 않습니다. 배우 섭외도 끊기고, 책이 무슨 소용이랴 모두 내 던지고, 머릿속의 먹물을 빼버렸던 어떤 시절이 사이 읽기에 끼어있지만 이론대로 결코 빠지면 안됩니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시련을 기대합니다.  설교대신 드라마를 원합니다.

돈을 내고 살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시장에서 선택되지 않는다. 

이 책은 안마부터 시작되는 별의 별 서비스로도 모자라 집까지 모셔다줍니다. 다시 11번 장미!를 찾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대출받아 의료기계를 잔뜩 장만한 의사가 문을 열고 들오는 첫 환자를 대하는 마음으로 글을 쓸 준비가 됐는가?

이 비유는 의사의 소명과 밥벌이가 글쓰기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상상하게 합니다.  

방송국의 김탁환이 작가지망생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작가는 혼자 밥 먹을 줄 알아야 한다"였습니다. 저자는 인디라이터는 고독을 인정해야한다면서 이런 식으로 두툼한 살을 붙입니다.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를 인용하며 우리는 '흥미로운 예시도 없이 주장부터 한다. 에피소드도 없이 원론부터 말한다'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됩니다. 

'한 장의 원고지를 메우는 작가의 피를 토하는 고통'은 시인이나 소설가의 몫이다. 인이라이터는 '글을 쓰는 동안 자유롭고 글쓰기를 통해 오르가즘을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 글쓰기가 지겹거나 어렵가고 느낀다면? 쓰지 않으면 된다. 

저자의 문장들은 (가벼운게 아니라)가뿐합니다. 힘이 안들어 갑니다. 어떤 춤 강사의 말처럼 '춤출 때 근육을 쓰지마라'는 것을 글로 보여줍니다.

프로필 쓰기의 핵심은 '드러내기'다

그의 프로필을 봅니다. 16개의 책이 드러났습니다. 다른 책도 팔릴 것입니다. 저자는 기자의 발과 마감의 유전자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쓰든 '정보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쓰려고 하는 대부분의 정보는 이미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나와 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 해석은 이미지를 통해 전달된다.

결국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명로진은 이 책으로 글쓰기에 대한 그만의 해석법을 정리했습니다. '설명하든 묘사하든 재미있게 써라'가 그 중 하납니다. 하위 오락문화로 여겨진 '게임을 벤치마킹하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삼천포로 빠져라도 그렇습니다.  

물론 알고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헝그리 정신은 배고프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진짜 배고픈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그런 관문을 버틸만 하겠냐는 것입니다.

저작자 표시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연필 한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