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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청춘
잘한다, 청춘 2011/12/30

"나? 이제 많이 길들여였지." 대학에 갓 입학해서 만났던 친구를 서른 둘에 다시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에 길들여 졌냐고요? 20대의 분노, 욕망, 신념과 맞서던 바깥 세상으로부터 길들여진겁니다. 어쩌면 그때..

서점 명가 로드뷰❹ 대구 물레책방

'간디의 물레'처럼 이야기가 줄줄 감겨 나올 것만 같은 대구 수성경찰서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서 50미터쯤 올라갔을까. 작은 네모 간판이 보인다. 연둣빛 바탕에 쓰인 글씨 ‘물레책방’(이하 ‘물레’). 재밌는 이야기들이..

디지털 in, 디지털人-'나모이북에디터' 박광섭 대리

나모 인터랙티브(이하 ‘나모’)가 지난 달 ‘나모이북에디터’(Namo e-book Editor, 이하 ‘이북에디터’)를 내놓았다. 이북 에디터는 1인 전자 출판 시대를 맞아 기존의 출판용 데이터나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한 파일..

서점 명가 로드뷰❸ 대전 계룡문고

이야기가 넘치고 빛그림이 흐르는 일흔 다섯 번째 ‘서점 나들이’를 가다 막 어린티를 벗은 여자 아이 셋이 ‘왜요 아저씨’를 향해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넨다. 재잘재잘 말을 붙여오는 아이들에게 이 대표는 이내 반갑게 고개를 끄..

3월 eBook new Book
3월 eBook new Book 2011/03/09

<멀티북> 아기돼지 삼형제 이지넷 만듦 이지넷에서 개발한 Toddler eBook 시리즈로 전문 성우가 읽어주는 앱북이다. 동화를 읽어 주는 기능 뿐 아니라 부모님이나 아이가 직접 동화를 녹음 하여 들을 수 있으며, 동화 캐릭..

2월 eBook new Book
2월 eBook new Book 2011/03/09

<이북> 발리홀릭, 신들의 섬에서 노닐다 임진숙 지음 | eStory 펴냄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저자가 발리의 매력을 잊지 못해 다시 ‘신들의 섬’을 찾는다. 발리의 예술촌 우붓에서 민박하며 현지인들과 섞여 발리의 속살을 체험..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Q&A로 푸는 ‘전자책’ ②

서울 서대문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에서 진행한 《홍기빈, 자본주의를 말하다》 미니 강연회 참석자들의 물음표 선택 ⓠ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알기 쉬운 ‘전자책 사용 설명서’를 종합하고자 마련한 ‘독자참여형 전자책 Q&..

지면으로 만나는 ‘전자책 세미나’②

한국전자출판협회 주최 ‘2011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 제안 설명회 출판사와 개발사를 이어주는 ‘애플리케이션’ 다리 한국전자출판협회(회장 최태경)가 중소출판사와 중소개발업체의 협업을 돕고자 제안 설명회를 마련했다. 지난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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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운(외계인)은 인간의 지능에 비견될만한 우주선과 무기를 만들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소수민족이 겪어야만할 핍박을 20년간 견뎠을까. 
왜 인간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을까.
왜 지구에 왔을 때 미개한 문명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디스트릭트9>은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도 지금껏 보아왔던 외계인과는 구분된다.
차별화 전략으로 인해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프라운 자체가 모순덩어리다.

외계 혹은 미지의 세계가 지구를 침범하고 위기에 빠트렸던 지난 날 영화사, 몇 명의 주인공은 지구의 구원자가 되었다. 
<디스트릭트9>에도 또 한명의 영웅이 탄생하긴 하지만 그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웅일 뿐이다. 외계인 크리스토퍼 혹은
훗날 지구에서의 고통을 거두고 돌아갈 희망이 남아있는 나머지 외계인들에게. 아니면 철저히 본인을 위한 일이다.
한마디로 그는 결코 지구를 구하는 자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구는 외계인으로인해 위험에처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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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오히려 외계인의 겉모습을 한 소외받는 종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주지역 '슬럼'은 우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인간적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도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환상의 극적인 면모일 것이다. 이제껏 강력한 적敵으로 즐겨 다뤄졌던 그들이 고양이 먹이나, 인간의 법적 구속력만을 들먹거려 통제되는 하찮은 계급으로 변했다. 외향은 조금 다르지만 깊은 슬픔과 인간적 동지애까지 느껴지는, ET들을 불러모은 마을같다.   

모선을 움질일만한 에너지를 모으는 데 20년이 걸렸다는 설정으로 질문에 소박하게나마 답을 해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정말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인간보다 덜 폭력적이고, 오히려 방어능력이 더 발달된 평화로운 종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반면 프라운이 간직한 모순은 인간의 두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은 아이같기도 하고 미개인 같기도 한 생명체의 본능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살상무기를 발명했고 육고기를 통해 종족을 번식하는 거대해진 두뇌력을 자랑한다. 그들을 고립시킨 것은, 결국 인간이 그들을 두려워 한다는 증거다.

이런 예측불가능한 미지에 대한 공포가 '외계인 학대'라는 웃지못 할 영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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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혹자는 식인 멧돼지 차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보다, 괴물과 인간과의 대결에만 너무 집중한 것이 아니냐는 착한 말을 던졌다.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해먹은 도적질로 말하자면 어디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진짜 식인 멧돼지가 있다해도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래도 영화 <차우>가 친환경주의를 설파하지 않은 것은 참말 다행이다. 돈 내고 설교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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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가 쓴 수법은 오히려 한 수 위다. 개성 넘치는 <차우>의 인물들은 마치 인간이 여태껏 저질러왔던 행태를 되새김 하는것처럼 보였다.

주인공 김순경이 차우를 유인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진급이었다. 서민의 평범하고 소박한 꿈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발전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자연을 몰살했던 순한 인간의 얼굴이기도 하다. 담배나 음료수를 꼼치는 신형사의 얍삽한 행동들은 코믹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속물근성과 은밀한 욕구들을 읽어낼 수도 있다. 이장과 파출 소장, 곽사장의 관계는 설명할 것도 없이, 이해관계로만 얽힌 인간들의 속살 그대로다. 하다못해 주말 농장의 부부도 허울좋은 친환경 체험 아래 비위 상하는 의심을 품고 기어든 헤체된 가족일 뿐이다. 혼자 살겠다고 지게차에서 숨죽이던 순경도, 차우 앞에서 힘없이 우산을 펴들던 포수 천일만도 모두 조금씩 비틀어졌다. 웃음에 뼈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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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만의 입에서 흘러나온 <차우>의 탄생 이력이 아니더라도 모든 상황은 충분히 짐작된다. 비틀린 욕망이 괴물을 만든다는 메세지는 이미 <괴물>에서 학습했다. 괴물이 차우로 둔갑만 했다면 새로울 것도 없었겠지만 <차우>는 별 다른게 있는 영화였다. 

포수 백만배와 생태연구원 변수련의 미완성 연애감정처럼 찌릿하고, 발랄한 호흡은 <괴물>의 묵직한 서사와 비교된다. 가족애나 휴머니즘을 내세우지 않고도 '잡았다'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느낌이 왔다. 김순경이 치매 어머니를 찾으러 나선 길이기는 했지만 괴물에게서 구해낸다는 것과는 의미가 많이 다르다. 인물 하나하나,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지나친 몰입없이 진행되었던 점도 영화를 무겁지 않게 해주었다. 

다만 이미 힌트가 되었던 벼락불은 그 수단이 엘레베이터로 바뀌긴 했지만 과거로의 회기같은 의미를 읽어볼 수 있었다. 차우를 잡을 수 있는 건 인간도, 인간의 무기도, 차우의 죽음도 아닌 자연 그대로의 보존임을 환기시켜 주었다.(과장된 해석일 가능성이 있다.^^)  

보물찾기처럼 메세지를 숨겨놓은 감독의 재간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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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난 여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차곡차곡 챙겨 봐왔다. 영화들은 굴비 한 두름처럼 고른 편이었다. 냄새나 모양이 그랬고, 속살은 한 종류의 어류같았다.(제발 결레가 되지 않길 빌면서) 게중 <오!수정>같은 영화는 조금 튄다고 생각했다. 유독 흑백이라 오히려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건지는 몰라도 극영화에 가장 가까웠다고 할까. 

촬영 당일 시나리오를 나누어 주고 배우 개인의 연기 스펙트럼과 돌발성을 최대한 이용하는 그의 연출 방식은 유명하다. 그래서 극영화의 짜임새를 벗어난 즉흥적인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극중 인물이자, 배우 자신이자, 홍상수가 된다. <생활의 발견>의 명숙, 예지원이 막 떠오른다. 보통 배우들이 받는 칭찬인 '그 역을 참 잘 소화해냈다'라는 말은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는 반만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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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화들을 보고나면 시나리오나 결말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텔링은 거의 남지 않는다. 대신 낯선 유형의 인간들이 일으키는 사소한 말썽이나, 너무나 익숙해서 누구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말들이 떠오른다. 어리석은 주인공들에게는 큰 교훈이거나 개똥철학같은 말들 말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이야기거리는 인물들의 취향이다. 숨기고 있던 노골적이건 간에 여자(혹은 남자)를 밝히고, 거의 배울반큼 배운 사람들인데다가 얼굴도 다들 두꺼운 편이다.  

'괴물이 나왔던 영화' '유괴된 아들을 찾아다니는 영화'가 아니라 '그런 인간들이 나왔던 영화'로 더 잘 기억되는게 그의 영화다. 이번 영화를 보기 전에도 어떤 인간들이 나와서 어떤 돌발행동을 할 지 궁금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기대에 못미치지도, 지난 영화들보다 대단하지도 않은채 비슷한 공식에 다른 숫자들이 대입된것 같았다. 지적이면서도 철이 덜든(어른 소년?) 젊은 영화감독 구경남이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사람들과 섞이다가 다시 인생의 숙제를 하게될 그런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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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숨바꼭질하듯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대사를 찾았다. 영화가 지루해질 때 쓰는 방법이다. 매우 지루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사실, 그의 영화는 조금 참아야되는 부분도 있다. 남의 진솔한 이야기라고해도 모두 솔깃한건 아니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영화들은 기다릴만한 가치가 늘 있었다. 지루함은 그의 영화의 필수 조건이다. 기다리다보면 고현정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아는 만큼만 안다고 말해요."라고 웃으면서 한 방 먹여주는 것이다. 

주인공 구경남이 "인생의 불행은 짝을 못만나는 데서 오는 거예요."라고 주워들은 말을 내면화하지 못한채 내뱉으면 그 다음 상황이 정말 궁금해진다. 이런 어리석음은 지금보다 어린 관객이었을 때는 반성의 매개가 되기도 했고, 비웃음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영화로만 본다면 영화 속의 그들은 일종의 관음의 대상이다. 은밀한 곳 훔쳐보기는 홍상수 영화의 가장 큰 재미다. 

하지만 무엇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극장전>처럼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일종의 메타적인 성격을 띄는 점이다. 홍상수감독의 대리인처럼 보이는 배우 김태우를 통한 영화에 대한 변명들은 의미심장했다. 워낙 솔직함이 무기인 감독이라 낯을 두껍게하고 관람을 시작하기는 하지만 이번엔 좀 간지러운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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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영화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유형들이 이해가 되요."라든가 "왜 영화에 자기 얘기를 해요?"라는 질문에 "나도 잘 모르는데 다른 사람 얘길 어떻게해요?" 등, 홍상수 감독의 지난 영화들의 스타일이 짙게 떠오르는 대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영화 초반부에 감독 구경남이 '이번엔 꼭 200만이 넘게 보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 는 독백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당 영화<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가장 대중적인 스타일이라고 공언했던 감독의 의중과도 맞아떨어진다. 점점 재밌어지겠단 생각을 했다. 구경남을 통한 '자기(홍상수 감독) 얘기'를 시작해보겠다는 싸인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에서 영화학도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는 '대놓고' 보여주자는 식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구경남의 영화에 대한 변명이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겠지만 홍상수 감독의 경우 영화를 영화밖으로 끌어내는 비법들을 계속 써오고 있다. 우선 생활(일상이 아니다)을 영화로 끌어오고, 배우를 배우 밖으로 끌어내는 식으로,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에 포함된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얌전하고 은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엔 좀 더 과감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번 변주곡에서도 또 다른 감상을 얻은 샘이다. 나는 이 변주가 한 사람의 '나이듬'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에 늘 궁금해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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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마더>를 보며 내가 궁금한 건 파더였다. 어째서 파더에 대한 코멘트가 단 한 번도 용납되지 않았을까. 상상에 맡기시라~? 이건 한 치의 틈도 없이 '마더'에 대한 이야기다? 공평하게 과거사가 전부 배제된 것도 아니다. 독한 술을 마시고 온 마더는 문득 독약 박카스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서 도준이 '다섯살 때 엄마가 나 죽이려고 했잖아'라고 태연히 따지고 마더의 삶이 여태껏 얼마나 막막했을지 공감할 수 있었던, 그 부분이 이상했던건 아니다. 그렇게 과거를 들추며 앞뒤의 문맥을 이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왜 '파더'앞에서는 견고한 성벽을 쌓았느냔 말이다.

(혹시라도 내가 졸다가 파더 이야기를 놓쳤다면 이 포스팅은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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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국 내가 주목한 부분은 영화 속의 '파더'들 즉, 남자 혹은 가부장이다. <마더>는 엄마의 일그러진 모성만 담고 있는게 아니다. 영화의 전체 그릇이 우그러진듯 보였다. 마더의 반대편이 있는 모든 남성들은 하나같이 추악하고, 게으르고, 속물적이고, 우둔하다. 단 한 명도 마더의 손을 진심으로 잡아줄 수 없었다. 사건의 장본인 아들 도준은 물론이고, 가장 선한 인물로 보이는 형사마저도 골프공 하나로 살인사건을 마무리지으려고 했었다. 

진구는 치밀한 구석까지 겸비한 작은 악당이며, 변호사는 한마디로 양복입은 침팬치일 뿐이다. 그들을 어떤 차원에서 봐라보아도 윤리같은 건 쌈싸먹어버리는 돈에 눈 먼 이기주의자들이다. 더 중요한 건 여자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다. 진구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술집 딸과 어떤 죄책감도 없이 섹스를 즐기고 있다. 변호사는 아가씨를 끼고 의뢰인을 상대할만큼 낯짝이 두꺼운 데다가 처음 구치소에 면회갔던 날,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에게 저리치우라는 손짓을 할만큼 여성비하의 심리가 가득차있다.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인 진구는 도준을 빌미로 약자인 마더에게 돈을 뜯어내고, 또다른 살인의 희생자인 고물 할아버지도 첫번째 희생자인 여고생과 잠자리를 했던 더러운 인물이다. 늘어놓고 보니 더욱 절망적인 그들의 낯낯은 '마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해도 충분히 한 사회를 망가뜨릴 수 있는 군상들의 총집합이다. 영화에는 제거된 도준의 '파더'가 순전히 불의의 사고로 이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면 이보다 나은 인물이었으리라고 상상할 수는 없다.
 
어째든 사라진 '파더'의 자리에 나는 이 모든 남성들을 대입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창은 감독이 정제하고 또 정제한 하나의 세계라고 가정할 때, 마더가 가진 히스테리는 오로지 도준때문이거나 스스로의 것만은 아니다. 폭력적이고 음탕한 가부장 사회가 불러낸 귀신같은 것이다. 춤은 귀신의 한 판 굿이었고 마더의 살인은 액땜같았다.


영화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검색
 
도준은 정상적인 삶의 영위가 불가능한 어른이다. 마더도 다르지않았다. 이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매 한가지로 용감할 줄도 알고 비굴할 줄도 알며 집념과 생활력도 강하다. 하지만 오로지 아들의 등에 매달린 아주 좁은 삶의 창窓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건 마치 어딘가로 내쫓긴 한 여자를 바라보는 듯 서글프다. 내가 그녀에게 일말의 희망을 느껴던 부분은 스스로에게 침을 놓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죄책감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가 아들의 눈 말고, 오롯이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있게 되리라 믿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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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김씨 표류기>는 정말 괜찮은 영화였다. '희망'을 짜파게티에 담아내고도 유치하단 생각은 안들었다. 두 주인공의 '희망고갈상태'에 우리의 모습을 넌지시 견줄만했다. 그래서 희망을 갈구하는 오래된 주제를 꽤 희망적으로 받아들였다. 확실히 껴안아주고 싶은, 안기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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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는 기사의 내용은, 한국영화의 살 길이 더이상 웰-메이드에만 있지 않다는 평가였다. 좋은 영화 특유의 롱런이나 입소문이 제대로 끝발을 받지 못했나보다. <천하장사 마돈나>에 무척 기대를 걸었던 감독이고 순전히 내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웠지만 결과가 나쁘다니 애석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영화의 상큼함을 대변하지 못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외로 유쾌하고, 의외로 진지하고, 의외로 깔끔한 영화의 제목치고는 좀 구질구질하다. 이미 무인도 표류기의 영화들에 식상한 관객들에게 전혀 환기가 될 수 없었던 제목이다.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처럼 산뜻한 무언가가 있었다면 좋았겠다. 제목을 지어보자니 좋은 영화에 폐가 될것 같아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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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는 탄탄한 시나리오가 눈에 띈다. 대책없어보이는 상황이 기발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으로 전개되는 걸 보면서 매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단박에 울림을 주는 한 줄 대사도 많았다.

정재영(남자 김씨)은 무인도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어렵사리 물고기를 잡고, 더 고생한 결과 비둘기도 잡을 수 있었다. 어류보다는 조류가 맛있었는지 이런 덤덤한 독백을 한다.
'진화란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요.'
여자 주인공 정려원(여자 김씨)은 은둔형 외톨이로 방에 쳐박혀 인터넷과 카메라로 세상을 본다. 웹상에 가공인물을 만들어 자신의 모습으로 꾸민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되고싶은 인생이 있으면 회원가입만 하면 됩니다.'

<김씨 표류기>는 두 행성의 두 외계인이 사는 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남자 김씨는 짜파게티의 면을 만들기 위해 옥수수를 기르고 여자 김씨는 방에서 나오지 않기 위해 옥수수캔을 따먹는다. (이부분은 자본주의에대한 실랄한 풍자 같았다. 오버일까?) 결국 남자 김씨는 무인도의 '더이상 바랄게 없는 완벽한 심심함'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반면 여자 김씨는 이제 자신만의 방에서 나와 세상을 향한 한 발을 내딪고 싶어한다. 그것도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 한 남자로인해.

그래서 E.T.의 손가락 맞춤만큼이나 두 김씨의 만남은 떨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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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에 대사란 없다. 독백만 있을 뿐인데도 이 영화는 소통을 위한 영화다. 세상의 외톨이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 우리는 고독을 넘어서 외톨이로 진화해가는 지도 모른다. 빚을 떠넘기는 대부업체같은 괴물들과 공존해야하고 거대한 인터넷의 도시에 자기만의 가짜집을 짓기도 한다. 과장된 환타지 속에서 우리의 속살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희망은 원래 식욕만큼 순수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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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한 예술 하는 조각가가 있었다. 심미안에 걸맞는 여성편력을 가진 남자였다. 세상 어떤 여인도 자신의 파트너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버릇없는 생각으로 가득찼던 그는, 직접 여자를 만들기로 했다. 예술가의 머릿 속에서 나온 조각상은 완벽했다. 몸은 소위 말하는 팔등신 이었고, 지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순결한 빛을 지녔다. 조각가가 이 작품을 귀애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놈팽이들에게 웃음을 흘리고 다니거나 천한 몸짓으로 유혹할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브론지노(Angelo Bronzino)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               
                                                                    브론지노(Angelo Bronzino)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

그래서 그는 점점 깊숙히 자신이 만든 작품에 빠져버렸다. 스스로의 재능을 찬양하기를 넘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날마다 조각상을 바라보던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에 ’갈아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녀가 진짜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를 전해들은 아프로디테는 그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조각상에 숨을 불어넣어준다. 정신빠진 예술가의 판타지는 이렇게해서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알고보면 신답지 않은 그리스의 신들은 누구보다 순결한 사랑을 강요하고 질투와 애증으로 서로 복수심에 불탄다. 지극히 감상적인 아프로디테다운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그림같은 신화>의 저자 황경신도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비겁한 꿈’이라고 퉁을 준다.

 

신화는 신화일 뿐이고 예술가는 신들의 이야기를 비틀만한 재능을 가졌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라는 묘비명으로 퀴즈쇼에 자주 출몰하는 영국작가 버나드 쇼. 비문답게 그는 번뜩이는 독설과 유머로 많은 말을 남겼고 이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피그말리온>이라는 희곡으로 썼다. 또 오드리 햅번이 나오는 고전영화<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이 된다.

조지 버나드 쇼의<피그말리온>은 신화 속의 이야기와는 달리 자신의 창조주를 배신한다. 하지만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는 피그말리온(헨리 히긴스 교수)을 선택한다.

빈민가에서 근근히 하루하루를 버티는 꽃팔이 아가씨(일라이자-갈라테이아)가 상스런 말투와 천박스런 행동을 버리고 숙녀가 되기까지 음성학자 헨리 히긴스는 혹독한 훈련을 시킨다. 무정한 독재자처럼 그녀의 감정은 묵살하고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숙녀로 ’조각’하기 위해 마음껏 재능을 시험한다. 모든 것은 순조로워보였다. 거친 원석에서 멋들어진 작품이 나온 것이다. 헨리 히긴스는 희열에 차올랐고 자신의 업적에 감탄한다.
 포스터
아카데미-작품, 남우(렉스 해리슨), 감독, 촬영, 미술, 음향, 편곡 등 7개부문을 수상했으며 오드리 헵번이 가장 아름다웠던 전성기 때의 작품이다. 브로드웨이에서 7년동안 롱런한 뮤지컬을 영화화했다.

하지만 갈라테이아가 조각상일 때는 몰라도 생명을 얻었을 땐 스스로의 운명을 움직일만한 ’영혼’도 얻었으리라. 순종은 어디까지나 목줄이 풀리기 전 이야기다. 버나드 쇼는 이 부분을 비틀었고 헐리우드의 복합영상예술물은 그 결말에 만족하지 못했다. 모두 행복해져야 직성이 풀리는 휴머니즘은 가끔 옛날 이야기만큼이나 구식이다. 여자를 물로 보는 이기적인 교수님은 더 깨달아야할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여성의 포용력(일라이자의 간택)으로 쉽게 용서 받았다.

이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신화와 희곡, 영화 순으로 옮겨지는 동안 이들은 한 몸에서 나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세 명의 갈라테이아를 만들어낸 샘이다. 
인간은 조물주의 솜씨이건 유인원이 진화한 결과이건, 사는 동안에는 오로지 ’나’일 뿐이다. 운명의 힘이 얼마나 센지는 몰라도 ’나’는 언제나 갈림길에 선다. 운명에 순종할 지, 그것을 뒤바꿀지, 또 운명과 협상을 할 지 말이다.
 
공교롭게도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로 예술가(버나드 쇼)는 운명에 반항하고, 대중문화(마이 페어 레이디)는 영합하고, 옛이야기는 순종한다. 이야기가 화석처럼 보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버나드 쇼 덕분에 갈라테이아의 운명에 혼자 부당함을 느낄 필요도 없고, 우리가 바라기만 한다면 헤피엔딩도 문제없다. 

 출처: 마이페어레이디: 네이버 영화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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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그래픽 노블(그림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다

원작이 없는 영화가 드물어졌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면 원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게 수순 같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나면 으레 원작이 있나 없나 검색창을 두드리곤 한다. 그래야 무식함을 겨우 면한다. 

원작과의 비교가 필수불가결한 이런 작업에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혹시 원작의 후광에 덕 좀 보자는 게으른 발상은 아닐까? 보통 원작이 되는 작품들의 수준이나 재미는 이미 공인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허술한 교과서로 공부를 가르칠 교사는 없을 것이다. 반면 수준 높은 원작의 깊이를 체험한 독자들은 영화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말처럼, 원작 따라잡기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원작의 아우라까지도 포함한 모방작이 얼마나 될까. 작가가 아니고서야 행간의 의미를 누가 다 읽어낼 수 있겠는가. 또 영상은 오히려 한정된 영역만을 선보이면서 독자 개개인이 누렸던 무한 상상력을 제한할 가능성이 크다. 난 실재로 원작을 본 사람치고 영화 칭찬하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다.

한 가지 대안이 있다면 원작을 바꾸거나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관객의 평가를 극으로 나누는 데 일조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야기가 영상이 된다는 것은 참 매혹적인 일이다.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인 갈망은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어린 시절 동화책부터였다. 영상에 중독된 세대이긴 하지만 여전히 스토리텔링의 힘은 막강하다. 영화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황이다’ 라고 나는 말해보고 싶다. 왜냐면 눈 앞에 막 떠오른 영상은 언제나 시간 속으로 흘러가 버리니까. 그러나 글은 다르다. 음미하고 되뇌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책은 언제까지고 읽혀지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원작이 존재하는 영상을 볼 때의 우리의 자세는, 영상과 원작을 가능한 분리해야 손해보지 않는다는 게 내 결론이다. 비교가 되는 건 당연지사겠지만 영상을 영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공평할 것 같다. 꼭 공평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원작보다 한참 못하다면 욕 좀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일일이 대조차트까지 만들어서 잔소리하는 일은 별로 생산적인 것 같지는 않다. 주제가 축소되고 변질되는 건 그릇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왓치맨의 히어로 중 코미디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지독한 마초이지만 자기파괴적이면서도 예언적인 면이 공존한다.


알랜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


영화 <왓치맨>에서 히어로의 고뇌를 조금 맛보고 알랜 무어의 원작 <왓치맨>에서는 좀 더 심오한 고뇌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또 영화 <왓치맨>에서 살아 움직이는 화려한 영상미에 흠뻑 빠지고 그래픽 노블 <왓치맨>에서는 생생한 색감과 고전적 그림기법들을 감상하는 것이다. 

비교는 정말 즐거운 일이지만 가끔 오롯한 즐거움을 누리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나는 아직 앨랜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을 보지 않았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왓치맨>을 통해 원작의 깊이를 상상해 보았을 뿐이다. 원작은 내게 분명 기쁨을 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왓치맨>의 세련되고 시적인 영상이 가진 흡입력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뭘 먼저 봤느냐가 가산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예가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기차 박물관과 기차역은 용도가 다른 법이니까.



글/사진 : 인터파크도서 기자단 2기 박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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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친구를 이성의 잣대로 재단한다면 딱 정떨어지기 좋을 일이고, 연인을 정복하는데 있어 감정만 앞세운다면 마음의 순결함이야 어떻든 실패하기 십상이다. 이런 일상적인 문제에서부터 감정과 이성은 가끔 우리의 운명을 가르는 선택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스타트렉:더 비기닝>에서도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애초 그런 고민은 때려치우고 직관과 본능에 의지하는 용감무쌍한 주인공도 나온다. 둘 사이의 고민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이 왜 유아틱해 보일까.

세트와 CG의 상상력은 최상급이고 이미 정평이 난 시리즈물의 한 편인데도 그다지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스릴을 만끽하지도 못했다. 별다른 흠을 발견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골목대장 놀이를 본 것같은 느낌이 든다. 식상한 갈등 구조 때문일까. 불우한 어린시절. 부모의 원한. 원한에 의한 앙갚음. 악의 탄생. 규율과 금기. 인간적 고뇌와 운명. 순수한 희생. 뭐 한 가지 가벼운 축이 없을 정도로 묵직한 편인데 어쩐지 죄다 모아 놓고 보니 집중할 만한데가 별로 없었다. 
간혹 영화의 인물들이 살아움직이면 그들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 된다. 그럼 말그대로 영화의 세계에 발을 담근다. 사적인 접근만으로도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타트렉:더 비기닝>은 심정의 내면화와 시각화 사이에서 갈등한 흔적이 해결되지 않았다.
 
미래라면 인간의 철학적 의문도 좀 더 깊어지면 좋으련만. 옷만 갈아입은 시리즈물에 대한 헛된 기대 탓일까.

 스틸이미지           
 스틸이미지

운명에 대한 코멘트만해도 그렇다. 시간터널과 순간이동, 블랙홀이 등장하면서 시간에 대한 미래개념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미래를 경험하는 행운을 얻는데 늙어버린 현재의 라이벌을 통해 정해진 운명을 확인하면서 용기를 얻는다. 혹독한 라이벌이 진실한 우정이 된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가져야할 매우 건전한 성향임에 틀림없지만 상대의 이성을 균열시키는 해법과 감정의 변화과정은 전혀 섬세하지 못했다. 

 스틸이미지

철없는 주인공은 유전적 재능으로 책임감을 얻고 경직된 라이벌은 실전을 통해 유연성을 얻게되는 과정이 모조리 드러난다면 좀 촌스럽다고할 수있지 않을까. 난 판타지에서 인물의 세공은 훨씬 정교해야한다고 생각한다.(혹, 매트릭스나 메멘토가 이에 해당할 수 있을까.) 그래야 누구든 속아넘어갈테니까. 영화를 뛰어넘는 영감까지 바라지야 않겠지만 인물에게 비쥬얼에 걸맞는 정성을 아끼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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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달아 본 한국영화 세 편은 이런 식이었다. <워낭소리>와 <똥파리>는 무척 불편했다. 대중영화의 평화로움을 지켜준 <과속스캔들>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하긴 독립영화로 분류된 먼저의 두 영화가 선선히 무언가를 내어줄리 없다. 불편함이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불편당'을 지어놓고 몸을 숙여 방을 드나든다던 화가가 생각난다. 흐트러진 마음은 몸을 움직이며 정돈한다는 그의 말이 꼭 맞기를 바랄뿐이다. 

두 영화가 불편했던건 바로 그들이 진짜를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과속스캔들>이 이건 가짜야 라고 말하면서 유머와 과장과 속도전을 벌이고 있을 때 <워낭소리>는 슬로우 스텝으로 끊임없이 잡념을 유도한다. 비교가 무의미하겠지만 각 분야에서 비교적 잘만들어진 영화 세편을 견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난 서영이와 남편만 빼고 뭐든 비교하기로 마음먹은 아줌마다.(속으로는 비교한다) 

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2008 / 한국)
출연 최원균, 이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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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칼라건 불루칼라건 알바생이건 일에 지친 일꾼들이 일마치고 영화관람을 했다면 잠들기 딱좋은 봉화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잠들지 않았다면 수없이 많은 생각이 물길을 만들며 불어나진 않았을까. 먼저 고지식한 농꾼이었던 나의 외조부 생각이 났고 늘 뒤에서 궁시렁대기만 하시던 외할머니도 떠올랐다. 그들의 삶은 우리와는 너무 다르지만 그들끼리는 또 비슷한 모양이다. 자려던 중에 외양간 밖으로 뛰쳐나온 송아지를 문 뒤에 숨어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 날도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들과 전혀 섞이지 못했던 감정들도 고스란히 밀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난 영화와 섞이지 못했다. 딱 소가 땅에 뭍힌 만큼 슬펐다고 해야할까. 나와 다른 궤도의 행성에 사는, 어쩌면 그들은 소같았다. 어찌 소의 일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처럼 소와 함께 평생을 일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꽃이 흔들리고 바람이 이삭의 고랑을 만들때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우리보다 자연스러운 것인가 되묻기도 하였다. 과연 오만 생각을 동원하면서 본 이 영화가 감독이 만든 <워낭소리>가 맞을까 싶다가도 '보이는게 맞는거다'라던 데이빗 린치의 말을 떠올렸다.
 
똥파리
감독 양익준 (2008 / 한국)
출연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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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비하면 <똥파리>가 아예 독립영화 쪽으로 기운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극적인 시나리오가 대중극영화를 떠올리게 했고 얼마만큼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충분히 내용을 예상하게 만들었다. 조금 비껴나간점이 있다면 <과속스캔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속어들이 난무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금기를 깰만큼 독보적이지 않았을까) 또 죄와 벌을 따지자는 영화도 아니었다. 그래서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이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적어도 헐리웃의 영웅물처럼 악을 무찌른다고 쾌감이 들지는 않는다는 거다. 또 신선한 배우들의 연기가 실제인가 착각하게 했다. 아무래도 독립영화의 매력은 뉴페이스다. 
마지막으로 모든걸 떠나 결말의 방식이 좋았다. 최대한 끝까지 가보려고 한 것 같은 감독의 열정이 느껴졌다. 무슨말을 하고싶은지 명확히 알고있는 사람은 전달도 확실하기 마련이다. 얼버무리지 않는 전략이 감독겸 주연배우 양익준을 잊을 수 없게끔 했다.

다시 한번 <과속스캔들>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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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셀룰러
감독 데이빗 R. 엘리스 (2004 / 독일, 미국)
출연 킴 베이싱어, 크리스 에반스, 윌리암 H. 메이시, 에릭 크리스찬 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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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영화를 욕하면서도 뻔뻔하게 계속 본다. 잠들기 전, 혹은 깨어나서 기름칠 잘한 기계처럼 돌아가야하고 그 시간을 쓰는데 뻔한 영화는 엄청나게 편리하다. 세탁기나 청소기처럼. 오락물에 대한 몰입이 그닥 질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하여도 내 생활은 가끔 킬링타임용 영화에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셀룰러>는 전화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폰부스>같은 영화와 비교될 수 있겠지만 좀 다르다. 헐리웃의 스릴러 공식이 다르게 대입된 경우다. 폰부스가 비극적이고 음울한 긴장감을 계단식으로 끌어올린다면 이 셀룰러는 천진한 아이가 고무줄 놀이를 하듯 당겼다 놓는 상황이 반복된다. 결정적으로 셀룰러가 돋보이는 점은 단연 유머다. 이 유머가 아이의 유희같단 느낌을 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미국식 코미디를 좋아하는 편이다. 대놓고 웃기거나 어쩐지 웃긴 <덤앤더머>나 <나인야드> 같은, 미국냄새가 잔뜩 나는 코미디가 재밌다. 특히 B급이라 불리는 영화들은 간혹 좀 더 웃긴다. 이 셀룰러도 블랙유머나 비꼬기, 아이러닉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웃기기만 한다. 말하자면 그 어떤 정치색도 띠지 않은채. (셀룰러의 장르를 따지자면 코미디는 아니다. 스릴러라고 봐야할 것이다.)

헐리웃의 블록버스터를 뭉뚱그려 떠올려보면 그 안엔 선과 악 두 갈래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 미묘한 세상의 다른 기준들은 얼마간 무시하고 흑과 백만 남겨 몰입을 유도한다. 그 시간 동안은 지구를 지켜야 한다거나 악을 내몰아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느낄 정도로 강렬하다. 

나의 일상과는 몇억만광년이라도 떨어져 있을법한 그런 이야기들에 마음이 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맞이했던 대통령들의 계보만 읊어도 머리가 아플지경이다. 그들은 범죄자가 분명하거나 손도 안대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들을 선의 자리에 앉힌건 결국 우리의 손이 라는 점이 분명하다면 상황은 이렇다. 선의와 선의가 만나도 악의가 탄생하는 우리 세상은 절대 두갈래가 아니다. 어떤 선의도 오해받을 수있고 어떤 악의도 무마될 수 있는 회오리 속이다. 

<셀룰러>에는 착한 놈과 나쁜놈이 있어서 우리의 위치를 조금 분명히 해준다. 내가 저 순진무구한 청년에게 닥친 일을 겪는다면 의심없이 발벗고 약자를 구하리라. 내게 절대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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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