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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청춘
잘한다, 청춘 2011/12/30

"나? 이제 많이 길들여였지." 대학에 갓 입학해서 만났던 친구를 서른 둘에 다시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에 길들여 졌냐고요? 20대의 분노, 욕망, 신념과 맞서던 바깥 세상으로부터 길들여진겁니다. 어쩌면 그때..

서점 명가 로드뷰❹ 대구 물레책방

'간디의 물레'처럼 이야기가 줄줄 감겨 나올 것만 같은 대구 수성경찰서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서 50미터쯤 올라갔을까. 작은 네모 간판이 보인다. 연둣빛 바탕에 쓰인 글씨 ‘물레책방’(이하 ‘물레’). 재밌는 이야기들이..

디지털 in, 디지털人-'나모이북에디터' 박광섭 대리

나모 인터랙티브(이하 ‘나모’)가 지난 달 ‘나모이북에디터’(Namo e-book Editor, 이하 ‘이북에디터’)를 내놓았다. 이북 에디터는 1인 전자 출판 시대를 맞아 기존의 출판용 데이터나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한 파일..

서점 명가 로드뷰❸ 대전 계룡문고

이야기가 넘치고 빛그림이 흐르는 일흔 다섯 번째 ‘서점 나들이’를 가다 막 어린티를 벗은 여자 아이 셋이 ‘왜요 아저씨’를 향해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넨다. 재잘재잘 말을 붙여오는 아이들에게 이 대표는 이내 반갑게 고개를 끄..

3월 eBook new Book
3월 eBook new Book 2011/03/09

<멀티북> 아기돼지 삼형제 이지넷 만듦 이지넷에서 개발한 Toddler eBook 시리즈로 전문 성우가 읽어주는 앱북이다. 동화를 읽어 주는 기능 뿐 아니라 부모님이나 아이가 직접 동화를 녹음 하여 들을 수 있으며, 동화 캐릭..

2월 eBook new Book
2월 eBook new Book 2011/03/09

<이북> 발리홀릭, 신들의 섬에서 노닐다 임진숙 지음 | eStory 펴냄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저자가 발리의 매력을 잊지 못해 다시 ‘신들의 섬’을 찾는다. 발리의 예술촌 우붓에서 민박하며 현지인들과 섞여 발리의 속살을 체험..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Q&A로 푸는 ‘전자책’ ②

서울 서대문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에서 진행한 《홍기빈, 자본주의를 말하다》 미니 강연회 참석자들의 물음표 선택 ⓠ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알기 쉬운 ‘전자책 사용 설명서’를 종합하고자 마련한 ‘독자참여형 전자책 Q&..

지면으로 만나는 ‘전자책 세미나’②

한국전자출판협회 주최 ‘2011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 제안 설명회 출판사와 개발사를 이어주는 ‘애플리케이션’ 다리 한국전자출판협회(회장 최태경)가 중소출판사와 중소개발업체의 협업을 돕고자 제안 설명회를 마련했다. 지난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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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운(외계인)은 인간의 지능에 비견될만한 우주선과 무기를 만들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소수민족이 겪어야만할 핍박을 20년간 견뎠을까. 
왜 인간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을까.
왜 지구에 왔을 때 미개한 문명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디스트릭트9>은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도 지금껏 보아왔던 외계인과는 구분된다.
차별화 전략으로 인해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프라운 자체가 모순덩어리다.

외계 혹은 미지의 세계가 지구를 침범하고 위기에 빠트렸던 지난 날 영화사, 몇 명의 주인공은 지구의 구원자가 되었다. 
<디스트릭트9>에도 또 한명의 영웅이 탄생하긴 하지만 그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웅일 뿐이다. 외계인 크리스토퍼 혹은
훗날 지구에서의 고통을 거두고 돌아갈 희망이 남아있는 나머지 외계인들에게. 아니면 철저히 본인을 위한 일이다.
한마디로 그는 결코 지구를 구하는 자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구는 외계인으로인해 위험에처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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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오히려 외계인의 겉모습을 한 소외받는 종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주지역 '슬럼'은 우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인간적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도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환상의 극적인 면모일 것이다. 이제껏 강력한 적敵으로 즐겨 다뤄졌던 그들이 고양이 먹이나, 인간의 법적 구속력만을 들먹거려 통제되는 하찮은 계급으로 변했다. 외향은 조금 다르지만 깊은 슬픔과 인간적 동지애까지 느껴지는, ET들을 불러모은 마을같다.   

모선을 움질일만한 에너지를 모으는 데 20년이 걸렸다는 설정으로 질문에 소박하게나마 답을 해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정말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인간보다 덜 폭력적이고, 오히려 방어능력이 더 발달된 평화로운 종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반면 프라운이 간직한 모순은 인간의 두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은 아이같기도 하고 미개인 같기도 한 생명체의 본능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살상무기를 발명했고 육고기를 통해 종족을 번식하는 거대해진 두뇌력을 자랑한다. 그들을 고립시킨 것은, 결국 인간이 그들을 두려워 한다는 증거다.

이런 예측불가능한 미지에 대한 공포가 '외계인 학대'라는 웃지못 할 영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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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난 여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차곡차곡 챙겨 봐왔다. 영화들은 굴비 한 두름처럼 고른 편이었다. 냄새나 모양이 그랬고, 속살은 한 종류의 어류같았다.(제발 결레가 되지 않길 빌면서) 게중 <오!수정>같은 영화는 조금 튄다고 생각했다. 유독 흑백이라 오히려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건지는 몰라도 극영화에 가장 가까웠다고 할까. 

촬영 당일 시나리오를 나누어 주고 배우 개인의 연기 스펙트럼과 돌발성을 최대한 이용하는 그의 연출 방식은 유명하다. 그래서 극영화의 짜임새를 벗어난 즉흥적인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극중 인물이자, 배우 자신이자, 홍상수가 된다. <생활의 발견>의 명숙, 예지원이 막 떠오른다. 보통 배우들이 받는 칭찬인 '그 역을 참 잘 소화해냈다'라는 말은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는 반만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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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화들을 보고나면 시나리오나 결말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텔링은 거의 남지 않는다. 대신 낯선 유형의 인간들이 일으키는 사소한 말썽이나, 너무나 익숙해서 누구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말들이 떠오른다. 어리석은 주인공들에게는 큰 교훈이거나 개똥철학같은 말들 말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이야기거리는 인물들의 취향이다. 숨기고 있던 노골적이건 간에 여자(혹은 남자)를 밝히고, 거의 배울반큼 배운 사람들인데다가 얼굴도 다들 두꺼운 편이다.  

'괴물이 나왔던 영화' '유괴된 아들을 찾아다니는 영화'가 아니라 '그런 인간들이 나왔던 영화'로 더 잘 기억되는게 그의 영화다. 이번 영화를 보기 전에도 어떤 인간들이 나와서 어떤 돌발행동을 할 지 궁금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기대에 못미치지도, 지난 영화들보다 대단하지도 않은채 비슷한 공식에 다른 숫자들이 대입된것 같았다. 지적이면서도 철이 덜든(어른 소년?) 젊은 영화감독 구경남이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사람들과 섞이다가 다시 인생의 숙제를 하게될 그런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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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숨바꼭질하듯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대사를 찾았다. 영화가 지루해질 때 쓰는 방법이다. 매우 지루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사실, 그의 영화는 조금 참아야되는 부분도 있다. 남의 진솔한 이야기라고해도 모두 솔깃한건 아니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영화들은 기다릴만한 가치가 늘 있었다. 지루함은 그의 영화의 필수 조건이다. 기다리다보면 고현정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아는 만큼만 안다고 말해요."라고 웃으면서 한 방 먹여주는 것이다. 

주인공 구경남이 "인생의 불행은 짝을 못만나는 데서 오는 거예요."라고 주워들은 말을 내면화하지 못한채 내뱉으면 그 다음 상황이 정말 궁금해진다. 이런 어리석음은 지금보다 어린 관객이었을 때는 반성의 매개가 되기도 했고, 비웃음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영화로만 본다면 영화 속의 그들은 일종의 관음의 대상이다. 은밀한 곳 훔쳐보기는 홍상수 영화의 가장 큰 재미다. 

하지만 무엇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극장전>처럼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일종의 메타적인 성격을 띄는 점이다. 홍상수감독의 대리인처럼 보이는 배우 김태우를 통한 영화에 대한 변명들은 의미심장했다. 워낙 솔직함이 무기인 감독이라 낯을 두껍게하고 관람을 시작하기는 하지만 이번엔 좀 간지러운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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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영화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유형들이 이해가 되요."라든가 "왜 영화에 자기 얘기를 해요?"라는 질문에 "나도 잘 모르는데 다른 사람 얘길 어떻게해요?" 등, 홍상수 감독의 지난 영화들의 스타일이 짙게 떠오르는 대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영화 초반부에 감독 구경남이 '이번엔 꼭 200만이 넘게 보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 는 독백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당 영화<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가장 대중적인 스타일이라고 공언했던 감독의 의중과도 맞아떨어진다. 점점 재밌어지겠단 생각을 했다. 구경남을 통한 '자기(홍상수 감독) 얘기'를 시작해보겠다는 싸인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에서 영화학도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는 '대놓고' 보여주자는 식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구경남의 영화에 대한 변명이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겠지만 홍상수 감독의 경우 영화를 영화밖으로 끌어내는 비법들을 계속 써오고 있다. 우선 생활(일상이 아니다)을 영화로 끌어오고, 배우를 배우 밖으로 끌어내는 식으로,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에 포함된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얌전하고 은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엔 좀 더 과감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번 변주곡에서도 또 다른 감상을 얻은 샘이다. 나는 이 변주가 한 사람의 '나이듬'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에 늘 궁금해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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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마더>를 보며 내가 궁금한 건 파더였다. 어째서 파더에 대한 코멘트가 단 한 번도 용납되지 않았을까. 상상에 맡기시라~? 이건 한 치의 틈도 없이 '마더'에 대한 이야기다? 공평하게 과거사가 전부 배제된 것도 아니다. 독한 술을 마시고 온 마더는 문득 독약 박카스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서 도준이 '다섯살 때 엄마가 나 죽이려고 했잖아'라고 태연히 따지고 마더의 삶이 여태껏 얼마나 막막했을지 공감할 수 있었던, 그 부분이 이상했던건 아니다. 그렇게 과거를 들추며 앞뒤의 문맥을 이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왜 '파더'앞에서는 견고한 성벽을 쌓았느냔 말이다.

(혹시라도 내가 졸다가 파더 이야기를 놓쳤다면 이 포스팅은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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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국 내가 주목한 부분은 영화 속의 '파더'들 즉, 남자 혹은 가부장이다. <마더>는 엄마의 일그러진 모성만 담고 있는게 아니다. 영화의 전체 그릇이 우그러진듯 보였다. 마더의 반대편이 있는 모든 남성들은 하나같이 추악하고, 게으르고, 속물적이고, 우둔하다. 단 한 명도 마더의 손을 진심으로 잡아줄 수 없었다. 사건의 장본인 아들 도준은 물론이고, 가장 선한 인물로 보이는 형사마저도 골프공 하나로 살인사건을 마무리지으려고 했었다. 

진구는 치밀한 구석까지 겸비한 작은 악당이며, 변호사는 한마디로 양복입은 침팬치일 뿐이다. 그들을 어떤 차원에서 봐라보아도 윤리같은 건 쌈싸먹어버리는 돈에 눈 먼 이기주의자들이다. 더 중요한 건 여자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다. 진구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술집 딸과 어떤 죄책감도 없이 섹스를 즐기고 있다. 변호사는 아가씨를 끼고 의뢰인을 상대할만큼 낯짝이 두꺼운 데다가 처음 구치소에 면회갔던 날,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에게 저리치우라는 손짓을 할만큼 여성비하의 심리가 가득차있다.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인 진구는 도준을 빌미로 약자인 마더에게 돈을 뜯어내고, 또다른 살인의 희생자인 고물 할아버지도 첫번째 희생자인 여고생과 잠자리를 했던 더러운 인물이다. 늘어놓고 보니 더욱 절망적인 그들의 낯낯은 '마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해도 충분히 한 사회를 망가뜨릴 수 있는 군상들의 총집합이다. 영화에는 제거된 도준의 '파더'가 순전히 불의의 사고로 이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면 이보다 나은 인물이었으리라고 상상할 수는 없다.
 
어째든 사라진 '파더'의 자리에 나는 이 모든 남성들을 대입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창은 감독이 정제하고 또 정제한 하나의 세계라고 가정할 때, 마더가 가진 히스테리는 오로지 도준때문이거나 스스로의 것만은 아니다. 폭력적이고 음탕한 가부장 사회가 불러낸 귀신같은 것이다. 춤은 귀신의 한 판 굿이었고 마더의 살인은 액땜같았다.


영화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검색
 
도준은 정상적인 삶의 영위가 불가능한 어른이다. 마더도 다르지않았다. 이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매 한가지로 용감할 줄도 알고 비굴할 줄도 알며 집념과 생활력도 강하다. 하지만 오로지 아들의 등에 매달린 아주 좁은 삶의 창窓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건 마치 어딘가로 내쫓긴 한 여자를 바라보는 듯 서글프다. 내가 그녀에게 일말의 희망을 느껴던 부분은 스스로에게 침을 놓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죄책감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가 아들의 눈 말고, 오롯이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있게 되리라 믿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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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김씨 표류기>는 정말 괜찮은 영화였다. '희망'을 짜파게티에 담아내고도 유치하단 생각은 안들었다. 두 주인공의 '희망고갈상태'에 우리의 모습을 넌지시 견줄만했다. 그래서 희망을 갈구하는 오래된 주제를 꽤 희망적으로 받아들였다. 확실히 껴안아주고 싶은, 안기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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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는 기사의 내용은, 한국영화의 살 길이 더이상 웰-메이드에만 있지 않다는 평가였다. 좋은 영화 특유의 롱런이나 입소문이 제대로 끝발을 받지 못했나보다. <천하장사 마돈나>에 무척 기대를 걸었던 감독이고 순전히 내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웠지만 결과가 나쁘다니 애석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영화의 상큼함을 대변하지 못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외로 유쾌하고, 의외로 진지하고, 의외로 깔끔한 영화의 제목치고는 좀 구질구질하다. 이미 무인도 표류기의 영화들에 식상한 관객들에게 전혀 환기가 될 수 없었던 제목이다.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처럼 산뜻한 무언가가 있었다면 좋았겠다. 제목을 지어보자니 좋은 영화에 폐가 될것 같아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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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는 탄탄한 시나리오가 눈에 띈다. 대책없어보이는 상황이 기발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으로 전개되는 걸 보면서 매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단박에 울림을 주는 한 줄 대사도 많았다.

정재영(남자 김씨)은 무인도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어렵사리 물고기를 잡고, 더 고생한 결과 비둘기도 잡을 수 있었다. 어류보다는 조류가 맛있었는지 이런 덤덤한 독백을 한다.
'진화란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요.'
여자 주인공 정려원(여자 김씨)은 은둔형 외톨이로 방에 쳐박혀 인터넷과 카메라로 세상을 본다. 웹상에 가공인물을 만들어 자신의 모습으로 꾸민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되고싶은 인생이 있으면 회원가입만 하면 됩니다.'

<김씨 표류기>는 두 행성의 두 외계인이 사는 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남자 김씨는 짜파게티의 면을 만들기 위해 옥수수를 기르고 여자 김씨는 방에서 나오지 않기 위해 옥수수캔을 따먹는다. (이부분은 자본주의에대한 실랄한 풍자 같았다. 오버일까?) 결국 남자 김씨는 무인도의 '더이상 바랄게 없는 완벽한 심심함'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반면 여자 김씨는 이제 자신만의 방에서 나와 세상을 향한 한 발을 내딪고 싶어한다. 그것도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 한 남자로인해.

그래서 E.T.의 손가락 맞춤만큼이나 두 김씨의 만남은 떨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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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에 대사란 없다. 독백만 있을 뿐인데도 이 영화는 소통을 위한 영화다. 세상의 외톨이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 우리는 고독을 넘어서 외톨이로 진화해가는 지도 모른다. 빚을 떠넘기는 대부업체같은 괴물들과 공존해야하고 거대한 인터넷의 도시에 자기만의 가짜집을 짓기도 한다. 과장된 환타지 속에서 우리의 속살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희망은 원래 식욕만큼 순수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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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가까운 친구를 이성의 잣대로 재단한다면 딱 정떨어지기 좋을 일이고, 연인을 정복하는데 있어 감정만 앞세운다면 마음의 순결함이야 어떻든 실패하기 십상이다. 이런 일상적인 문제에서부터 감정과 이성은 가끔 우리의 운명을 가르는 선택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스타트렉:더 비기닝>에서도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애초 그런 고민은 때려치우고 직관과 본능에 의지하는 용감무쌍한 주인공도 나온다. 둘 사이의 고민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이 왜 유아틱해 보일까.

세트와 CG의 상상력은 최상급이고 이미 정평이 난 시리즈물의 한 편인데도 그다지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스릴을 만끽하지도 못했다. 별다른 흠을 발견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골목대장 놀이를 본 것같은 느낌이 든다. 식상한 갈등 구조 때문일까. 불우한 어린시절. 부모의 원한. 원한에 의한 앙갚음. 악의 탄생. 규율과 금기. 인간적 고뇌와 운명. 순수한 희생. 뭐 한 가지 가벼운 축이 없을 정도로 묵직한 편인데 어쩐지 죄다 모아 놓고 보니 집중할 만한데가 별로 없었다. 
간혹 영화의 인물들이 살아움직이면 그들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 된다. 그럼 말그대로 영화의 세계에 발을 담근다. 사적인 접근만으로도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타트렉:더 비기닝>은 심정의 내면화와 시각화 사이에서 갈등한 흔적이 해결되지 않았다.
 
미래라면 인간의 철학적 의문도 좀 더 깊어지면 좋으련만. 옷만 갈아입은 시리즈물에 대한 헛된 기대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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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에 대한 코멘트만해도 그렇다. 시간터널과 순간이동, 블랙홀이 등장하면서 시간에 대한 미래개념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미래를 경험하는 행운을 얻는데 늙어버린 현재의 라이벌을 통해 정해진 운명을 확인하면서 용기를 얻는다. 혹독한 라이벌이 진실한 우정이 된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가져야할 매우 건전한 성향임에 틀림없지만 상대의 이성을 균열시키는 해법과 감정의 변화과정은 전혀 섬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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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주인공은 유전적 재능으로 책임감을 얻고 경직된 라이벌은 실전을 통해 유연성을 얻게되는 과정이 모조리 드러난다면 좀 촌스럽다고할 수있지 않을까. 난 판타지에서 인물의 세공은 훨씬 정교해야한다고 생각한다.(혹, 매트릭스나 메멘토가 이에 해당할 수 있을까.) 그래야 누구든 속아넘어갈테니까. 영화를 뛰어넘는 영감까지 바라지야 않겠지만 인물에게 비쥬얼에 걸맞는 정성을 아끼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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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연달아 본 한국영화 세 편은 이런 식이었다. <워낭소리>와 <똥파리>는 무척 불편했다. 대중영화의 평화로움을 지켜준 <과속스캔들>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하긴 독립영화로 분류된 먼저의 두 영화가 선선히 무언가를 내어줄리 없다. 불편함이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불편당'을 지어놓고 몸을 숙여 방을 드나든다던 화가가 생각난다. 흐트러진 마음은 몸을 움직이며 정돈한다는 그의 말이 꼭 맞기를 바랄뿐이다. 

두 영화가 불편했던건 바로 그들이 진짜를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과속스캔들>이 이건 가짜야 라고 말하면서 유머와 과장과 속도전을 벌이고 있을 때 <워낭소리>는 슬로우 스텝으로 끊임없이 잡념을 유도한다. 비교가 무의미하겠지만 각 분야에서 비교적 잘만들어진 영화 세편을 견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난 서영이와 남편만 빼고 뭐든 비교하기로 마음먹은 아줌마다.(속으로는 비교한다) 

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2008 / 한국)
출연 최원균, 이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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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칼라건 불루칼라건 알바생이건 일에 지친 일꾼들이 일마치고 영화관람을 했다면 잠들기 딱좋은 봉화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잠들지 않았다면 수없이 많은 생각이 물길을 만들며 불어나진 않았을까. 먼저 고지식한 농꾼이었던 나의 외조부 생각이 났고 늘 뒤에서 궁시렁대기만 하시던 외할머니도 떠올랐다. 그들의 삶은 우리와는 너무 다르지만 그들끼리는 또 비슷한 모양이다. 자려던 중에 외양간 밖으로 뛰쳐나온 송아지를 문 뒤에 숨어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 날도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들과 전혀 섞이지 못했던 감정들도 고스란히 밀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난 영화와 섞이지 못했다. 딱 소가 땅에 뭍힌 만큼 슬펐다고 해야할까. 나와 다른 궤도의 행성에 사는, 어쩌면 그들은 소같았다. 어찌 소의 일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처럼 소와 함께 평생을 일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꽃이 흔들리고 바람이 이삭의 고랑을 만들때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우리보다 자연스러운 것인가 되묻기도 하였다. 과연 오만 생각을 동원하면서 본 이 영화가 감독이 만든 <워낭소리>가 맞을까 싶다가도 '보이는게 맞는거다'라던 데이빗 린치의 말을 떠올렸다.
 
똥파리
감독 양익준 (2008 / 한국)
출연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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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비하면 <똥파리>가 아예 독립영화 쪽으로 기운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극적인 시나리오가 대중극영화를 떠올리게 했고 얼마만큼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충분히 내용을 예상하게 만들었다. 조금 비껴나간점이 있다면 <과속스캔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속어들이 난무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금기를 깰만큼 독보적이지 않았을까) 또 죄와 벌을 따지자는 영화도 아니었다. 그래서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이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적어도 헐리웃의 영웅물처럼 악을 무찌른다고 쾌감이 들지는 않는다는 거다. 또 신선한 배우들의 연기가 실제인가 착각하게 했다. 아무래도 독립영화의 매력은 뉴페이스다. 
마지막으로 모든걸 떠나 결말의 방식이 좋았다. 최대한 끝까지 가보려고 한 것 같은 감독의 열정이 느껴졌다. 무슨말을 하고싶은지 명확히 알고있는 사람은 전달도 확실하기 마련이다. 얼버무리지 않는 전략이 감독겸 주연배우 양익준을 잊을 수 없게끔 했다.

다시 한번 <과속스캔들>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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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셀룰러
감독 데이빗 R. 엘리스 (2004 / 독일, 미국)
출연 킴 베이싱어, 크리스 에반스, 윌리암 H. 메이시, 에릭 크리스찬 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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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영화를 욕하면서도 뻔뻔하게 계속 본다. 잠들기 전, 혹은 깨어나서 기름칠 잘한 기계처럼 돌아가야하고 그 시간을 쓰는데 뻔한 영화는 엄청나게 편리하다. 세탁기나 청소기처럼. 오락물에 대한 몰입이 그닥 질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하여도 내 생활은 가끔 킬링타임용 영화에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셀룰러>는 전화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폰부스>같은 영화와 비교될 수 있겠지만 좀 다르다. 헐리웃의 스릴러 공식이 다르게 대입된 경우다. 폰부스가 비극적이고 음울한 긴장감을 계단식으로 끌어올린다면 이 셀룰러는 천진한 아이가 고무줄 놀이를 하듯 당겼다 놓는 상황이 반복된다. 결정적으로 셀룰러가 돋보이는 점은 단연 유머다. 이 유머가 아이의 유희같단 느낌을 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미국식 코미디를 좋아하는 편이다. 대놓고 웃기거나 어쩐지 웃긴 <덤앤더머>나 <나인야드> 같은, 미국냄새가 잔뜩 나는 코미디가 재밌다. 특히 B급이라 불리는 영화들은 간혹 좀 더 웃긴다. 이 셀룰러도 블랙유머나 비꼬기, 아이러닉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웃기기만 한다. 말하자면 그 어떤 정치색도 띠지 않은채. (셀룰러의 장르를 따지자면 코미디는 아니다. 스릴러라고 봐야할 것이다.)

헐리웃의 블록버스터를 뭉뚱그려 떠올려보면 그 안엔 선과 악 두 갈래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 미묘한 세상의 다른 기준들은 얼마간 무시하고 흑과 백만 남겨 몰입을 유도한다. 그 시간 동안은 지구를 지켜야 한다거나 악을 내몰아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느낄 정도로 강렬하다. 

나의 일상과는 몇억만광년이라도 떨어져 있을법한 그런 이야기들에 마음이 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맞이했던 대통령들의 계보만 읊어도 머리가 아플지경이다. 그들은 범죄자가 분명하거나 손도 안대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들을 선의 자리에 앉힌건 결국 우리의 손이 라는 점이 분명하다면 상황은 이렇다. 선의와 선의가 만나도 악의가 탄생하는 우리 세상은 절대 두갈래가 아니다. 어떤 선의도 오해받을 수있고 어떤 악의도 무마될 수 있는 회오리 속이다. 

<셀룰러>에는 착한 놈과 나쁜놈이 있어서 우리의 위치를 조금 분명히 해준다. 내가 저 순진무구한 청년에게 닥친 일을 겪는다면 의심없이 발벗고 약자를 구하리라. 내게 절대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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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미인도에 이어 쌍화점까지. 아줌마는 영화의 질을 떠나 한국영화를 매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의 질에 대해 폄하하는 건 아니다.) 자개 장롱 이불 사이에 숨어있던 산딸기 파이브를 중학교 단짝과 문고리를 잡고 볼 때만 해도 이불 속에서 일어나는 일는 모두 상상에 맡겨야만 했다. 오히려 그 토속적인 비디오가 왜 이불 속에 숨어있어야 하는지 의아하기 까지 했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유명 감독의 개봉작과 흥행작으로 떳떳하게 영화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위 영화들의 성애 수위를 말없이 반길 뿐이다.
이유있는 노출은 무의미한 감춤보다 훨씬 건전하다. 세상사람 모두가 아는 일을 이유없이 감추는 건 오히려 강조다. 미인도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대사가 등장한다. 무릇 그림을 음탕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보는이의 마음일 뿐이라고. 문란함을 따지기 이전에 자신의 침대가 문란하다는 생각을 먼저 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청소년 유해환경노출을 걱정한다면 그런건 하기 않아도 된다. 청소년은 개봉영화가 아니라 미개봉 복사물로 늘 스스로 심도있게 공부 하고 있다. 넌센스지만 미개봉 복사물을 줄이기 위해 상영작들의 수위를 높히는 게 방법이 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위 두 영화를 아줌마는 매우 건전하게 관람했다. 특히 쌍화점에서, 불붙어가는 성애 그 자체가 곧 사랑이 되는 일치점을 보았던 게 좋았다. 점잖떨며 아가페적 사랑과 성적인 것을 떼어놓으려는 노력이 분분한 한국영화의 틀 밖에 선 것 같아서 시원스런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주진모의 처절한 연기에 힘입어 동성애의 미화로 흐르지 않은 것이 못내 반갑다.
또 미인도에서는 신윤복의 그림세계가 성애에 대한 강력한 뒷받침을 하고 있어 매우 든든한 노출인 샘이다. 가장 찐한 수위라고 한다면 체위를 재현하는 장면을 양반들이 모여 앉아 영화를 보듯 관람하는 장면이다. 현대의 영화관은 그런 구실을 못하고 있지만. 이제 더이상은 <거짓말>이나 <그래도 좋아>같은 후진적 희생물이 나오지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두 편의 한국영화를 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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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참 오랜만에 날것같은 영화를 만났다. 팔딱거리는 민물장어를 건져올려서 못이 박힌 각목으로 쉽없이 내리치고 어느새 피장어가 되버린 굳은 놈을 다시 강물 속으로 쳐박는 섬뜩함. 생명이 꺼짐에도 신선도가 있다면 <boy A>에선 갖 죽은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게다가 물을 부유하는 그 붉은 장어가 벌어진 아가미와 함께 페니스를 닮았다면 영화의 상상은 정말 끔찍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비극적이고 지나치게 끔찍해서, 지나치게 아름답다면 말이 될까. 

   스틸이미지스틸이미지

미적이라는 건 슬픔에도 해당된다. 분명. 아가의 귀여움, 아가씨의 사랑스러움, 당연히 아름다운 것보다 때론 슬픔이 이토록 아름답다. 저기, 우리를 등진 소년은 매우 여리고 착한 '보이'였지만 지울 수 없는 실수로 '보이A'가 되고만다. 익명의 누군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한 소년의 비극은 서서히 드러난다. 영화는 보여주기와 감추기를 반복하면서 관객을 소년의 삶의 편린으로 끌어당긴다.

소년은 그밖의 소년처럼 일하고 놀고 사랑하지만, 어찌된일인지 소년이 세상으로 들어갈수록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그건 굳이 소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세상에 던져지고 끊임없는 상처를 통해 세상과 섞인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왜냐면 조금 더 사랑받았으니까.
아쉽게도 소년은 단련되지 못했다. 엄마는 죽어가고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저질렀다. 죄를 모르고 죄의 값을 받는 것은 누구라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어째서 삶은 스스로 질 수 없는 짐을 얹기도 하는걸까. 그렇다면 삶을 내던질밖에.

소년에겐 흰고래(여자친구의 별칭)같은, 바다같은 '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보이 A>를 보면서 내 삶의 보호막을 어루만진다. 나의 엄마, 나의 아기, 나의 남편, 나의 집, 나의 책, 나의 고독. 내가 자처하는 고독과 그가 내몰린 고독은 정 반대에 있었다.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다면 고독이 뼛속까지 침입할 것이다. 그럼 참을 수 없이 텅 비어버리겠지.

영화는 픽션을 거부하며 생생함으로 영상의 시를 쓴다. 소년의 기억에 의존하는 척하며 적당하게 스토리를 드러내는 솜씨가 예사롭지않다. 이미지의 충돌이 주는 파장은 관객의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희망을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겠다.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슬프게 들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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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본둥 만둥 심심한 옴니버스 영화가 때되면 나온다. 때란 물리적인 따뜻함이 필요한 겨울, 혹은 크리스마스, ~데이 즈음.  이색적인 사랑이야기가 콩트처럼 엮인 이런 영화들은 시즌을 타고 그럭저럭 흥행 성적표를 유지한다.

<사랑을 부르는 파리>. 제목만 들어도 포스터까지 훤하다. 영화가 말을 거는게 아니라 관객이 먼저 알아보고 감동을 계산한다. 그과 그녀의 이별 -10점, 또 다른 그와 그녀의 우연 +10점, 결국 그와 그녀의 합체 x10으로 적당한 감성지수를 유지하며 영화는 나라별 시기별로 재생된다. 깔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데도 영 심심한 그 맛이 너무들 서로 닮아 있어 달리 할 말이 없다.

몇 년 전 러브 액츄얼리처럼 운좋게 신선함이 끼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연애가 끝난 서른의 주부는 이제, 치고 올라온 수많은 젊은 연인들에게 빈자리를 내어준다. 세대 공략용 영화(한국식 마케팅에 한해-이 영화 자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들은 이제 그만 기웃거려야겠다.

인물들이 바톤을 넘기며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주어도 별다른 쾌감이나 감동이 오지 않는다. 주부 생활지수가 올라간 대신 감성지수는 뚝 떨어진 때문일까. 이런 사이클이 편리해 보이기는 한다. 한 가지 이야기만 파고 들어 관객을 질리도록 사랑의 도가니로 몰아넣지 않는다. 듬성듬성 엮어가는 소쿠리 같다고나 할까. 가볍고 시원한. 
이 영화가 그닥 가벼웁지만은 않은데도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 건 아픔도 반복되면 별거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을 부르는 파리> 중 한 꼭지는 최근 본 <엘레지>와 너무 빼닮았다. 게다가 <엘레지>의 중요한 배경음악이 남성의 고독을 상징하는 장면에서 똑같이 사용된다.

그래도 이 영화가 신선할 수 있다면 그건, 지금도 갓태어난 연인들이 설레는 맘으로 극장엘 가기 때문이다.

사랑을 부르는, 파리
감독 세드릭 클라피쉬 (2008 / 프랑스)
출연 줄리엣 비노쉬, 로맹 뒤리스, 패브리스 루치니, 알베르 뒤퐁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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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