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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청춘
잘한다, 청춘 2011/12/30

"나? 이제 많이 길들여였지." 대학에 갓 입학해서 만났던 친구를 서른 둘에 다시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에 길들여 졌냐고요? 20대의 분노, 욕망, 신념과 맞서던 바깥 세상으로부터 길들여진겁니다. 어쩌면 그때..

서점 명가 로드뷰❹ 대구 물레책방

'간디의 물레'처럼 이야기가 줄줄 감겨 나올 것만 같은 대구 수성경찰서 옆으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서 50미터쯤 올라갔을까. 작은 네모 간판이 보인다. 연둣빛 바탕에 쓰인 글씨 ‘물레책방’(이하 ‘물레’). 재밌는 이야기들이..

디지털 in, 디지털人-'나모이북에디터' 박광섭 대리

나모 인터랙티브(이하 ‘나모’)가 지난 달 ‘나모이북에디터’(Namo e-book Editor, 이하 ‘이북에디터’)를 내놓았다. 이북 에디터는 1인 전자 출판 시대를 맞아 기존의 출판용 데이터나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한 파일..

서점 명가 로드뷰❸ 대전 계룡문고

이야기가 넘치고 빛그림이 흐르는 일흔 다섯 번째 ‘서점 나들이’를 가다 막 어린티를 벗은 여자 아이 셋이 ‘왜요 아저씨’를 향해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넨다. 재잘재잘 말을 붙여오는 아이들에게 이 대표는 이내 반갑게 고개를 끄..

3월 eBook new Book
3월 eBook new Book 2011/03/09

<멀티북> 아기돼지 삼형제 이지넷 만듦 이지넷에서 개발한 Toddler eBook 시리즈로 전문 성우가 읽어주는 앱북이다. 동화를 읽어 주는 기능 뿐 아니라 부모님이나 아이가 직접 동화를 녹음 하여 들을 수 있으며, 동화 캐릭..

2월 eBook new Book
2월 eBook new Book 2011/03/09

<이북> 발리홀릭, 신들의 섬에서 노닐다 임진숙 지음 | eStory 펴냄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저자가 발리의 매력을 잊지 못해 다시 ‘신들의 섬’을 찾는다. 발리의 예술촌 우붓에서 민박하며 현지인들과 섞여 발리의 속살을 체험..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Q&A로 푸는 ‘전자책’ ②

서울 서대문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에서 진행한 《홍기빈, 자본주의를 말하다》 미니 강연회 참석자들의 물음표 선택 ⓠ 왜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알기 쉬운 ‘전자책 사용 설명서’를 종합하고자 마련한 ‘독자참여형 전자책 Q&..

지면으로 만나는 ‘전자책 세미나’②

한국전자출판협회 주최 ‘2011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 제안 설명회 출판사와 개발사를 이어주는 ‘애플리케이션’ 다리 한국전자출판협회(회장 최태경)가 중소출판사와 중소개발업체의 협업을 돕고자 제안 설명회를 마련했다. 지난 1월..

책 자루2010/11/13 07:37
지난 10월 9일이 '한글날'이었다. 나라의 '국경일'이었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었다. 2005년 12월, 근 15년 간 각계의 노력으로 '다시' 국경일로 지정 되었지만 '빨간 날'로 기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노는 날이 많으면 나라가 가난해 진다는 것. 한글날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면서 빨간 날의 위력을 새삼 느낀다. 대신 그 날을 즈음하여 쏟아진 도서들이 '한글날'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한달 간 쉬엄쉬엄 한글 관련 책들을 읽어내렸다. 홀로 자축한 한글날. 쓸쓸하고 풍성하다. 책을 돌아보기 전에 한글에 얽힌 역사와 국어사전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    

   

한글날로 돌아보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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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즈음부터 읽기 시작한 4권의 책.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
이바라기 노리코/뜨인돌/2010.10.5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 여류작가, 한글로 한국을 말하다.


일본작가의 한국어 공부를 담은 책이다. 전후 일본문단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는 시로 국내에서 이미 유명세(?)를 얻었다. 공선옥 소설의 표제로 쓰였고, 이 시의 형식을 패러디한 작품이 유형진 시인의 등단작이 되기도 했다. 다만 원작이나 원작자의 모습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는데, 거꾸로 그가 '한글'과 '한국문화' '한국인'을 이야기 한다.  

작가의 한글 공부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50세에 남편을 잃은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글을 공부하며 사별의 슬픔을 달랜다. 그 즈음 발표한 에세이집이 <한글로의 여행>(1986)이었는데 그 중 '윤동주'라는 수필이 일본 고교 검정 교과서에 실렸고, 1995년 이를 소재로 한 <윤동주 특집> 프로그램이 NHK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양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번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은 이 에세이집의 번역작이자 '아사히 신문'에 연재 되었던 칼럼을 모은 것이다. 신문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라 그런지 쉽고 편안하게 쓰여졌다. 무엇보다 명랑하고 발랄하다. 한글 공부의 동기와 난관, 과정들을 술회하는 첫번 째 장 부터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의 아이러니를 재치있게 보여준다. 왜 하필 한국어냐는 숱한 질문에 작가는 '이웃 나라 말이잖아'라고 눙쳐보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을 아리송해 한다. 작가만큼은 '무난한' 대답임을 강조하지만.(일본 열도에 한류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당시 50세가 넘었던 작가의 나이나, 문학계에서의 위상을 고려해 본다면 지식인의 뻣뻣함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히려 한글, 한국에 대한 호기심은 아이와 같이 빛이 난다. 쉬운 단어와 소박함이 있는 '이웃나라 민요의 멋'을 알았던 소녀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조선시대 방랑 화가들이 그린 민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만의 애정으로 혹은 이방인의 눈으로 비춰지는 한글과 한국은 새삼스러운 데가 있다. 되려 '우리가 이런가?'라고 되묻게 된다. '한국어의 울림만큼 낭랑하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언어가 없다' 이 같은 낯 간지러운 구절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신선한 이유 중 하나다.

''당신'일까 '선생님'일까'라는 꼭지에서는 우리나라의 호칭문화가 슬쩍 드러난다. 상대방을 칭하는 대명사 '당신'이 부부사이에서는 허락되지만 연상에게는 무례한 칭호다. 성씨 뒤에 붙는'~씨' 역시 풀네임 뒤에는 가능하지만 성 뒤에 붙여 부르면 실례가 된다. 그래서 '저 나라에서는 선생님이 마구 오간다'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책 서평을 부탁하는 출판사로부터 필자도 왕왕 '선생님'이란 호칭을 듣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한글 표현법과 일본어 사이의 연관점, 차이점을 찾아낸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두 나라간의 격차와 뼈아픈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각 민족마다 발성기관의 고유한 특징이 있음을 역이용 해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을 잡아들여 학살한 일, 일본인이 '조선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 한국의 미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만들어낸 민족에 대해 냉담한 현실을 응시한다. 한글을 배워줘서 고마울 정도다. '한글'이라는 외형적 기능적 아름다움을 사랑하기보다 한글을 쓰는 민족을 이해하려는 마음씀이 뜨겁다.

그녀는 대표작에서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단순한 시구를 반복하며 패전 후 일본인들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담아냈다. 시대의 아픈 곳에 서 있고자 했다. 시를 사랑하는 만큼, 언어를 대하는 예민함을 작가는 '한글 공부'에서도 발휘한다. 학자나 전문가의 논리는 없지만 직관과 감성이 대신한다. 무엇보다 '이웃 나라'에 대한 애정이 깊으면서 단순하고, 단순하면서도 결이 곱다. 물고기가 물을 대하듯 한글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새삼 한글 속을 헤엄치게 하는 책이다. 굳이 한글의 우수성을 되새기기보다, 이바라기 노리코처럼 '관계' 속에서 언어를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이밖에 '일상 속 한국어 염탐기'라는 두번 째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속담, 기발한 일상어들, 세계 유래없는 '모국어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한국 이야기를 들려 준다. 또 네번 째 '여행길에 마주친 풍경'에서는 제목처럼 한국 여행길의 에피소드 들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장의 '역사에 깃든 한국문화의 표상들'에서는 묵직한 주제들을 다룬다. 숫자로 대신하는 우리나라의 두 기념일인 8.15와 6.25, 일제시대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이야기, '윤동주'라는 수필로 일본 문학 교과서에 소개되었던 '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등이 실렸다. 작가는 마지막 꼭지에서 윤동주가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으므로 '일본인 스스로 그 죽음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윤동주의 아우 '일주'씨 와의 만남, 시인의 작품세계, 그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다. 덧붙여 윤동주의 시가 다치하라 미치조의 시와 닮았음을 꼬집기도 한다.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

장승욱/하늘연못/2010.10.1

찰진 우리말 뒤엉킨 도사리 장터

글쓴이 장승욱은 알아주는 한글 전문가다. 한글문화연대가 선정한 '우리말글작가상' 수상작가로 지난 해 한글날 즈음에서 <우리말은 재미있다>를 펴내기도 했다. 이번 책은 우리말의 '도사리'를 모아 풀어 쓴 사전 형식이다. 책의 절반은 아예 사전처럼 꾸며 '말모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도사리'란 익는 도중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말하는데 이 책을 내면서 '도사리를 한 광주리 모아 팔겠다고 시장 귀퉁이에 나앉아 있는 촌부의 심정'이라고 했다. <우리말은 재미있다>가 집대성된 형태인 듯 하다.  (오른쪽 사진은 <다 알지만 잘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에서)

'사전' 같은 딱딱함은 없다. 우리말 하나하나를 투박한 듯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말 맛이 일품이다. 꾸밈 없고 시원시원한 문장에 속도감이 있다. 생소하면서도 낯익은 우리말들을 한눈에 구경할 수 있는 장터는 흔치 않다. '사전'의 탈을 쓰고 저자가 떠는 '익살'을 즐거이 감상하는 동안 찰진 우리말이 뒤엉킨다. 가령 '총각김치과 홀아비김치'라는 꼭지에서는 '처녀김치가 없으므로 영원히 총각신세를 면할 가망이 없는 총각김치도 있다'고 운을 떼며 '홀아비 김치'를 소개한다. 거기다 '총각이 어떻게 홀아비가 되었는지 시간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고 덧붙이며 ' 써레기김치, 섞박지, 덤불김치, 얼갈이김치, 지레김치, 둥둥이김치 등을 차례로 소개 한다. 마지막에는 수수께끼도 낸다. '김치 가운데 가장 맛이 없는 김치는?' 답은 '기무치'다. 이렇게 생활, 세상, 자연, 사람, 언어 속의 우리말들을 175꼭지에 걸쳐 소개한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문장편
김철호/유토피아/2010.10.15

한글을 제대로 쓰기 위한 실용서다. 이미 <국어실력~>시리즈로 '국밥'이라는 별칭을 얻은 책의 '문장편'이다. 20년 동안 글쟁이로, 번역자로, 텍스트 편집자로 살아 온 저자가 낱말편에 이어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저자는 책에서 좋은 문장의 세가지 조건으로 '의미의 명확성''표현의 경제성''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글맛'을 든다. 또 이 각각의 목표를 실현한 또렷한 문장, 찰진 문장, 맛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알려준다.
 
'은/는' '이/가'로 대표되는 조사의 사용법, 헷깔리는 조사와 연결어미들의 미세한 차이를 다양한 예문과 연습문제를 통해 설명한다. 내몸처럼 쓰고 있는 한글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 문장을 쓸 때 흔히 저지르기 위운 중복과 쓸데없는 표현들을 걸러내는 방법을 비롯해, 꾸밈말, 문장성분의 호응 등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한다. 특히 구어체와 문어체에 대한 탐구 편을 통해 '어떻게 쓸 지'에 대한 방향을 잡아 주고, '번역문'에 대한 오류와 실례를 들어 문장 공부의 필요성을 더한다.        


<다 알지만 잘 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

배유안/책과함께어린이/2010.10.9

어른들도 '잘 모르는' 한글 이야기

글쓴이 배유안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소설로 쓴 <초정리 편지>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작가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이 책을 쓰기에 좋은 조건이다. '한글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지식, 그리고 오늘의 한글이 있기까지 험난했던 역사'를 돌아본다. 게다가 한 일본인에게 5년 넘게 한글을 가르쳤다니 이보다 더 한글을 '잘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까?
책은 조카와 조카가 데리고 온 일본인 친구에게 한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썼다. 만화가 정우열씨가 그림을 그려 흥미를 돗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책의 표제처럼 어른들도 '잘 모르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한글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고 크게 반발했던 쪽이 실은 집현적 학자들이었다는 사실. 문자를 가지고 있는 100여 개의 언어 중창제자가 밝혀진 문자가 손에 꼽힐 정도이며, 그 중 일상에서 쓰이고 있는 문자로는 한글이 유일하다는 점. 사라진 옛글자에 대한 발음과 사용 설명 등, 두꺼운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실(史實)들이 풍성하다. 모두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기반이 튼튼한 이유는 아마도 원저에 있을 것이다. 2008년 한글날 즈음 나온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 함께)이라는 인문서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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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책 자루2010/07/14 07:28
3차원이 기적인가요? 청소부가 쓰레기통에서 주운 로또표가 1등에 당첨되거나 무농약으로 생산한 사과의 수확량이 관행농법 과수보다 월등한 것, 청산가리를 털어넣고 고층빌딩에서 떨어지고도 별탈없이 살아난 것. 기적이라면 이 정도는 되야하지 않을까요.

평면으로 보이던 세상이 입체감을 띄기 시작한 게 과연 기적 축에나 끼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기적은 훨씬 자극적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일테면 사시가 시공간을 뛰어넘는 4차원을 경험했다든지, 목회자의 연단에서 그를 추종하던 눈 먼 어린양이 영성의 손길로 눈을 뜬다거나요.

사시 교정술로 눈은 정렬됐지만 입체시를 경험할 수 없었던 수전 배리 박사가 새롭게 경험한 3차원의 세상 <3차원의 기적>.
 
이 책의 '기적'은 역설입니다. 우리에게 3차원은 평범한 일상입니다. 제아무리 눈을 감아도, 사물과 자연의 질감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려해도 그녀의 결핍은 우리에겐 저절로 주어진 것이었기에, '체감'은 불가능했습니다. 거꾸로 장님 문고리 잡듯이 문장을 더듬거린 것은 저였습니다.


운전대가 자체의 공간 속에 둥실 떠 있었고, 운전대와 계기판 사이에는 손에 잡히는 부피의 빈 공간이 채워져 있었다. ...그날 내내 간헐적으로 또 순간적으로 전혀 예기치 않게 입체시를 보았고, 이는 절대 경이와 기쁨의 순간들을 가져다주었다. 가장 평범한 사물들이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다. 커다란 싱크대의 수도꼭지가 나를 향해 뻗어 나왔으며, 수도꼭지의 곡선은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랑스러웠다. ...나는 나뭇가지들 사이 공간의 부피를 단지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었고, 그 유혹적인 공간의 주머니들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도 좋아 그 주머니들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3차원의 기적> 154쪽




운전대와 계기판 사이의 부피, 수도꼭지의 사랑스런 곡선, 나뭇가지 사이의 공간? 실증나는 줄도 모르고 며칠이고 넋을 잃고 보았다는 그녀의 재조립된 세상이 제 눈에도 보였으면 싶었습니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녀는 경험과 추론 만으로 사물과 자연이 평면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겹쳐진 물건은 앞이 뒤를 가리고 있었으므로 공간을 추론했고, 가까운 건 크게 먼 곳은 작게 보이는 기초적인 단서들로 위치들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마흔이 넘어까지 쭉 보아왔다던 '평면의 세상'이란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아얘 앞을 보지 못하는 것에 쉬이 공감 수 있겠다 싶었죠. 



<사흘만 볼 수 있다면>/헬렌 켈러/산해
<3차원의 기적>/수전 배리/초록물고기


제 예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어서 읽은 헬렌 켈러의 자서전 '내가 살아온 이야기'가 실린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살에 눈과 귀를 멀고도 수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대학을 졸업한 과정들은 점자책과 헌신적인 설리번 선생님, 헬렌켈러의 지적 호기심으로 설명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각적 경험을 뛰어넘는 빽빽한 묘사들은 대체 어디서 태어난 걸까요?   


눈송이가 닿은 크고 작은 나무들마다 듬성듬성 주름진 잎사귀만 몇 남긴 채 발가벗고 선 걸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새들도 날아가버린 빈 둥지, 벌거벗은 나무는 온통 흰 분으로 덮여 있었다. ..차가운 손길이 지나간 대지마다 감각을잃고 나무의 원기마저 뿌리까지 마비되어 어둠에 움츠러든 몸뚱이는 잠에 빠져 있었다. 모든 생명이 꺼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시간 또 한 시간 저 높은 허공 어디에선가 눈은 점점 쌓여 높낮이를 알 수 없는 눈 세상을 만들었다. 밤새 내린 눈 때문에 아침이 되어도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통 분간할 수 없었다. 길이란 길은 죄다 눈 속에 파묻히고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리는 표지판 하나도 보이지 않는, 다만 나무에서 떨어진 눈만이 제 키를 계속 키울 뿐이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 120~121쪽




그녀가 자그마한 진동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내용들은 자주 나옵니다. 모여든 사냥꾼들이 일제히 자리를 털거나 체스판의 말을 옮기거나 할 때 전해지는 울림은 그녀가 보지 않고 감을 잡는 법을 귓띔해 줍니다. 하지만 소리도 없이 내려 쌓이는 눈에 대한 감각은 어디서 불러온 것일까요. 

스물 셋에 쓴 이 스물세 꼭지의 자서전 중 당당히 한 꼭지를 차지하고 묘사된 뉴잉글랜드 마을에서 보낸 겨울. 설국, 그 신비한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그녀에게 각인되었는지가 저는 못내 궁금했습니다. 누군가는 '마음으로 보는 법'을 말할 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는 '손'이라는 눈을 대신한 감각을 앞세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느때라면 두루뭉술 넘어가고 말았을 텐데 '체감할 수 없는 불편함'을 일깨운이 <3차원의 기적>이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헬렌켈러의 자서전에 앞서 실린 '내가 만일 사흘 동안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22쪽
 

이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깨닫는 촉감을 이용한 과정들이 기술됩니다. 심지어 목청껏 노래하는 한 마리 새의 지저귑으로 작은 나무가 행복해 하며 떠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보는 것'으로 간과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그녀에 비해 누가보아도 월등한 능력을 자랑하는 나의 시력이 실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점자책을 읽는 법을 배우면, 뇌 안에서 점자를 읽는 검지에서 촉각 입력을 받는 뉴런의 개수가 증가한다.'(34쪽)는 <3차원의 기적>이 한 말이었습니다. 또 "뇌는 시각으로 만진다"는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말을 인용(202쪽)하기도 했습니다.

헬렌켈러가 발휘한 묘사적 능력에는 언어적 재능이 십분 발휘되었겠지만, 그 이전에 감상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 그녀의 촉각 입력은 보는 것으로 만족할만한 우리의 패턴과는 다를 수 있음을 짐작해봅니다. 또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발달된 촉각은 '시각'을 대신해, 뇌로 설국의 풍경을 만지는데 충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눈 뿐만아니라 그녀의 손(피부)은 우리의 손과 다를것입니다. 눈만 감는다고 해서 그녀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순전히 착각이었던 거죠.   

또한 다수의 문학작품들을 섭렵하고 감동받아왔던 그녀의 감성이 '보이는 듯한' 비유를 건져올렸을 것입니다. 추상적인 문자 앞에서 만큼은 그녀와 우리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편리한 도구'로만 인식했을 때, 세상은 무척이나 초라해 질 수도 있음을 확인합니다. 

신경과학자로서 평면시에서 입체시로의 과정을 치밀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수전 배리박사가 경험한 3차원 역시도, 복잡한 두 눈의 융합과 입체적 생동감을 인식할지 못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들을 상상하게 합니다. 보지 못하면서 풍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입체시를 얻으면서 '보는 재미'를 느끼는 두 여자에게서, 저는 제가 가진 장애를 떠올립니다. 두 개의 눈으로 합쳐지는 하나의 세상과 각각의 깊이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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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책 자루2010/07/09 20:36
짧은 이바구 하나 들려드립니다.

http://ko.wikipedia.org/

옛날에 어떤 왕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은 세 아들을 똑같이 사랑해서 자기가 죽은 뒤 어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왕은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세 아들을 침대 곁으로 불러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내가 요즘 깊이 생각한 게 있는데, 지금 너희들한테 그걸 말해주고 싶다. 나는 너희들 중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왕국은 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자려고 누워 있을 때 비가 와서 제 눈으로 빗방울이 들어가더라도 이미 눈 감은 것 때문에 그냥 잠이 들 정도로 게으르거든요."
가장 나이 많은 아들이 먼저 말하자 둘째 아들이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왕국은 제 것입니다. 저는 난롯가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발을 끌어당기는 것이 귀찮아서 차라리 발꿈치를 불에 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 게으르거든요."
셋째 아들이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왕국은 제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게으르냐 하면 제가 교수형을 당하게 돼서 제 목에 올가미가 씌워져 있는데, 누가 제게 그 밧줄을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칼을 준다고 해도 차라리 교수형을 당하고 말지 귀찮게 제 손을 움직여서 밧줄을 자르지 않을 정도거든요."
왕이 이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네가 제일 게으르니 네가 왕이 되거라."
-<어른들을 위한 그림형제 동화 전집>,231~232쪽(<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에서 재인용.)

듣자듣자 하니 게으름이를 찬양하다니요. 이 동화는 참 해롭겠습니다. 권선징악의 공식에 의한다면, 지혜의 씨름장인 동화판에 의한다면, 게으름을 증명하지 못해 어쩔줄 모르는 부지런이가 왕의 간택을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게으름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각인하지 않을까요.
 
그치만 아니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의 이재복 선생님에 의하면 말이죠. 뭐 꼭 선생님 말씀이 아니라도 도덕가의 주장이 무색할만큼 유쾌한 허풍들입니다. 마지막 발언권을 가질수록 유리한 경기 입니다. '게으름'이란 주제가 헛갈리게 만들지만 상상력과 기획력이 돋보이는 답입니다. 어른들은 메시지를 보지만 아이들은 유희합니다. 전혀 헤롭지 않을겁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이재복/문학동네/2010.6 


동화 공부장이 이재복은 더 많은 해석들을 내놓습니다. '근면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기존의 문화 바탕에서 나오는 고정 관념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보려는 대결 의식의 감정이 숨어 있다.''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과도한 경쟁 사회로 몰아가는 지금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내면에도 게으름이 영웅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다''일의 논리, 이성의 본질, 일중독에만 빠진 사람에게 게으름은 밖을 지향하는 일의 논리보다는 내면을 지향하는 감성적인 직감, 사랑의 본질, 애정 방식에서 여성의 원리를 상징하다고 볼 수 있다''게으름이 아이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옛이야기의 시시함을 단번에 깨뜨리는 대목이었습니다. 바보, 마녀(계모), 공주, 괴물이라는 전형도 얼마든지 전복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권선징악'에도, 잔혹한 이야기에도 새 힘을 나눠줍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못박았던 옛이야기 속의 대결 인물들을 '빛이 되는 인간과 그림자가 되는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빛과 그림자를 떼어 설명할 수 없듯이,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 인물은 모두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왜 이 당연한 사실을 품지 못했던 걸까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른들은 이런 동화를 이렇게 읽혔을 겁니다. '나쁜 짓을 하면 벌 받아.착한 사람이 되야 복을 받는 거야' 이제 아이들에게 다르게 읽어줘야 할껍니다. '너의 마음에도 착한이와 나쁜이가 있지?' 

잔혹한 이야기에도 '에너지가 강한 원형의 꿈'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나 꿈은 귀하게 여겨야 한답니다. 마음속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상징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라지요. 

참으로 조곤조곤, 이야기 하듯이 편하게 들려주는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는 성심껏 글씨를 따라 읽어주거나, 주제가 되는 교훈을 전달하고 마는 '책 읽어주기'의 함정을 깨닫게 합니다. 창의력에 목매 선호하는 창작동화, 좋은 습관에 얽매여 고르는 딱딱한 책들을 돌아보게도 만듭니다. 그런 와중에 뒷전이었던 옛이야기의 매력도 되찾습니다. 이야기가 놀이고, 유희고, 하나의 세계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그새 잊어버린듯 합니다. 건설적인 독서습관이나 학습태도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이야기 책'들이 재발견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전래동화나 명작동화 전집으로 공급책을 확보해야 할까요? 저는 이부분에 일말의 의심을 죽 품고 있었습니다. 유익함 말고도 책을 읽어주는 순간의 신체적, 감정적 교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귀로 듣고 머릿 속으로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빠져 못내 아쉬웠습니다. 제아무리 영감으로 가득하고, 아이의 마음을 끄는 그림이래도 '보는'는 행위에 그친다는게 불구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합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매일 밤 할머니가 들려주던 캥거루 이야기처럼 엄마만의 테마도 만들어보자는 제법 당찬 포부를 가졌지요. 책보다는 육성으로, 아이에게 곧 닥칠 분열되고 단절된 세계를 합쳐주고 싶었습니다. '종이'가 아닌 '품'이 앎의 시작이라는 점을 각인하고 싶었습니다.
 




순전히 제가 읽을 요량으로 짧은 이야기들이 실린 어린이 책 두 권을 보았습니다. 한 권은 이솝이야기, 또 한 권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편씩 읽고 들려주는 일이 여렵지 않아보였습니다. 돌아보니 아이를 업고 다닐 때, 가장 많이 들려준 이야기가 '호랑이와 곶감' 이었네요. 하지만 거기까지. 아이가 말을 시작하자 지루해 하는게 눈에 보였습니다. 그렇게 여러번 중단하고 나니 저도 힘이 빠져서는 반쯤 포기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위 <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와 이어 소개할 <베이비 스토리텔링>이 숨죽인 열망을 일깨웁니다. 맨 처음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했을 때 <책 읽어주고 이야기해주는 부모들>이란 흥미로운 책을 봤습니다. 들려주기 좋은 옛이야기의 매력은

지루한 설명 없이, 사건의 연속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 사건들은 그림을 보듯 이야기의 진행을 상상할 수 있고, 일말의 반복성이 있다.-<책 읽어주고 이야기해주는 부모들> 94쪽


<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와 비교한다면 옛이야기의 외형적 유용성을 언급하는 샘이네요. 옛이야기의 원본을 들려주기 좋게 압축하는 실예를 제시하고, 아이들의 경험과 환경에 맞게 지어낸 이야기들도 담습니다. 책은 고개를 주억거릴만 했지만 어쩐지 제 세치 혀는 굳어버렸습니다. 줄줄 꿸 것 같았던 이야기들이 통 입에 붙질 않았습니다. 아이가 지루한 것도 당연하지요.

그러다 이재복 선생님의 책에서 지당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명확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남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 24쪽

이 두 문장 안에 제가 저지른 실수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줄거리만 알고 감동 받은 적은 없다'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책 읽어주는 부모>가 언급했던 아이의 경험과 환경에 맞는 이야기를 발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베이비 스토리텔링>으로 이정표를 찾았습니다.


베이비 스토리텔링/로니 M.콜/팝콘북스/2010.4


이 책에는 주변의 부러움을 살만한,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가 등장합니다. 저자이기도 한 로니 M.콜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literary fairy tails'(새로 옷을 입힌 요정이야기-옛이야기)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직접 꾸며낸 환타지죠. 칙폭이(기차), 탁탁이(탭슈즈), 햄순이(햄스터)가 지구와 우주, 집안 곳곳을 여행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서 낯설거나 혹은 익숙한 경험을 하는 내용들입니다. 

별안간 걱정이 앞섭니다. "내가 과연 이야기를 지어낼 능력이 있을까?" 우선 이 중대한 문제는 덮어둡시다. 우선 잠자리 이야기가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잠 최면제라는 사실을 <베이비 스토리텔링>이, 서투른 제가 증명 합니다.

이런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그날부터 아이들은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또 하루를 마감하는 그러한 의식이 기대되어 날마다 행복에 겨워 잠자는 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11쪽

홈쇼핑에 미리 섭외된 충실한 사용자 후기 같지만, 지난 주 저희 모녀는 유례없이 평화로운 잠자리 시간을 가졌습니다. 엄마가 어디서 얻어온 이야기에는 시큰둥하던 아이가, 마당에서 시체로 발견된 우리집 암탉 '꼬꼬'가 밤이면 깨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다소 엽기적인 이야기에 열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옆집 언니도 나오고, 할머니 할아버지, 다른 동물들도 마구 등장시킵니다. 황당할 뿐 아니라 더듬거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나서서 잠자리 의식을 채근하는 아이에게 강력한 피드백을 받고 있습니다. 

<베이비 스토리텔링>의 신선한 이야기 창작법들을 조금 만나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디어와 먼저 친해지기 위해서 강력한 시각화의 기술을 사용하십시요. 
#대부분의 이야기에 늘 출현하는 핵심 등장 인물들이 있으면 이야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됩니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하세요.
#옛속담을 사용하면서 줄거리를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름을 짓고 이야기를 만드세요.


어떤가요? 가능할까요? 그래도 좀 어렵나요? 그렇다면 책이 제안한 한가지 묘수(잠자는 시간이 창의력을 발전시키기 좋다는 교육적 의미였지만)를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잠들기 전 우리의 정신에 답을 제시하라는 긍정적 명령 내릴 수 있습니다.' '뇌야.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해. 멋진 답얻을 수 있게 해줘. 고마워.'라고 말하는 거죠. 자기계발서의 우스꽝스러운 주문 같은가요?

어쨌든 저는 '이야기 들려주는 엄마'라는 명함을 놓칠 수 없습니다. 책값을 줄이려는 꼼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활자가 아닌 목소리로 감정과 온기를 전달하고픈 욕구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게 바로 이야기가 가진 밈[각주:1] 유전자 때문일까요? 
           

 

  1.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단위로 영국의 생물학자 도킨스의 저서《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소개된 용어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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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책 자루2010/06/30 06:54

시들어가는 독서의 맥을 살려라. 강하고 빠른 가슴 압박과 열린 기도로 들어오는 타인의 호흡. 쫓기는 자의 숨결이라도 좋다. 그게 날 더 숨가쁘게 할 지도 모른다. 가느다란 숨 한 올이 터질 때까지 내 머리를 젖히고 입을 덮어 축축하고 비릿한 날숨을 쑤셔 넣어라. 밤새 숨죽인 배추마냥 질기고 뚝뚝한 문자에 기필코 속도감을 실어줄 만한 구원수는 스릴러! 너 뿐이다.



 
만날 쓰는 것도 어렵지만 읽는게 어려울 땐 방도가 없습니다.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읽고 싶은 날, 장마도 흐지부지한 요새가 그렇습니다. 어쩌다 제프리 디버의 <잠자는 인형>을 들고 문자의 엔터테인먼트를 경험합니다. 책오락은 삼가는 지루한 아줌마가 제대로 걸렸죠. 미국식 스릴러도 스릴러였지만, 김영사의 자회사 비채가 선보인 <모중석 스릴러 클럽>에 얄팍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지은이도 옮긴이도 아닌 '모중석'과의 짤막한 인터뷰가 <잠자는 인형>의 마지막 세 쪽을 여흥으로 남겼을 때 검색어를 입력했습니다. '한사람이 기획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시리즈물을, 그것도 스릴러 장르의 책만 모아 출간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동아일보가 썼습니다. 10년동안 준비한 자료를 들고 도서출판 비채의 문을 두드렸다던(모중석 스릴러 클럽) 그의 행보가 가명을 한층 음침하게 만들더군요. 모던 스릴러 전문가라. 시간 죽이기로 작정한 독서에 즐거운 허영 한꺼풀.

곧장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다른 작품을 보아도 좋았겠지만 비채의 다른 장르기획인, <블랙 앤 화이트>시리즈(일본 추리 소설)의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숨 한번 고르지 않고 달아 읽었습니다. 마치 범인이라도 쫓듯 <살인광시곡1>까지 읽었을 땐 3일이 후딱 사라지고 없더군요. 그러고보니 미국, 일본, 한국의 장르문학을 맛본 샘입니다. 더불어 꽤나 유쾌했던 자연주의자 탐정소설<시튼 탐정 동물기>까지, 숨가쁜 독서 호흡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잠자는 인형/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미국식 스릴러물의 전형. 장르문학의 '원소스멀티유즈'로 영화가 떴다 하면 원작을 찾아봐야 될 정도니, 읽으면서 영상의 컷을 구상하는 것도 무리 없는 연결. 이미 작가의 작품 <본 콜렉터>가 영화화 되었고, 이 작품 역시 영화로의 재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거짓말을 할 때 사람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그들을 네 가지 감정 상태 중 하나로 떠밀어버린다. 분노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부정하거나, 적당한 타협을 통해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려 하거나. 워터스가 방금 내뱉은 '맹세코'와 '정말'이라는 단어는 흥분된 몸짓과 더불어 기선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이었다. 댄스는 교도관이 거짓말의 부정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확인했다. ..상대가 분노 단계에 접어들었다면 그가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계속 자극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부정 단계라면 사실을 무기 삼아 끈질기게 공격해야 한다.

유능한 여성 수사관 캐트린 댄스의 지적 활약이 돋보이는 이 스릴러는 동작학을 바탕으로 한 심문 전략을 전면에 내세운다. 지능적인 범인의 특질상 범인에 대한 심리분석이 다음 동선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양들의 침묵>을 필두로 한 미국 스릴러에서 공들여 다뤄지는 '수사관 머리 위에 올라선 범인'의 유형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똑똑한 범인들은 범죄라는 사슬마냥, 얽매인 자신의 규칙에 포박되기 마련이다. 철저한 규칙은 변수에 아둔하기도 해서 결정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고, 결국 거듭되는 반전의 빌미를 제공한다. 반전을 감상할 때, 반전에 필요한 복선을 얼마나 세심히 깔았느냐가 스릴러의 신뢰도를 높인다. <잠자는 인형>의 경우 대체로 네 가지의 반전이 은폐된 진실의 전구를 켠다. 서사를 완벽히 리와인드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잠자는 인형', 즉 숨겨진 피해자 부분에선 수시로 팽팽한 암시를 줬던 것 같다.

범죄 해석으로 뒤꽁무니를 쫓을 수밖에 없는 수사관이란 위치의 벌점은 범인의 프로필을 완성하며 만회된다. 범인 검거보다 심리적 압승이 더 짜릿하게 느껴진다. 범인을 잡느냐 놓치느냐는 지루한 정의의 문제일 뿐, '범인을 이해했다'는 통제적 안정감을 더욱 갈급하게 된다. 오히려 그가 더욱 심란한 난제를 던져 수사관을 골탕먹이길 바라는 건 스릴러에서 실현될 수 있는 환상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프로파일링 수사법과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한 기존의 수사법이 적절히 혼용되면서 두뇌적, 동적 추격 모두를 지루함 없이 만끽할 수 있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얼핏 추리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서술, 명탐정의 기대를 어기는 연이은 실수, '조각상에서의 동공처리'라는 미학적 모티브, 어느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더불어 치밀한 복선에 대한 괜찮은 재능 보다는 실제하는 가능성들이 어떻게 '사건'으로 변질되는 지를 지켜보는, 완벽하게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본격미스터리다.
 
'본격'이라는 단어가 궁금해 찾아봤지만 역시 작가이자 이 책의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의 설명이 가장 유력했다. 후미에 실린 인터뷰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탐정소설의 정의를 언급한다. "본격은 '수수께끼'와 '논리적 해결'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수께끼가 서서히 풀려가는 경로의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실은 이랬다'는 재미만으로도 실은 탐정 소설의 역할에 만족하긴 하지만, 독자와 탐정과의 공평한 싸움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동일한 사실관계의 조건에서 탐정을 제치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선점할 수 있다면? 그는 간혹 틀렸으나 나는 맞았다면? 쾌감은 배가 될 것이다.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는 인상평은 처음 꺼냈던 이 책의 매력에 근거를 둔다. 

의도를 거의 감지할 수 없었던 초반부 일상의 묘사는 사건이 발생되기 이전부터 독자가 참여할만한 여지를 주는 샘이다. 일종의 '사건일지'를 읽어가는 긴장감보다는 실제 '사건'을 맞닥뜨리는 거욷함이 즐겁다. 게다가 여러 가설을 재고하면서도 실패로 이어지는 수사상황에 '풀고 싶다'는 욕구가 유연하게 찾아온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부에서 5부로 이어지는 동안의 각 장의 서문을 장식하는 루돌프 비트코어의 <조각의 제작 과정과 원리>의 구절들이 제시하는 탐구의 가능성이다. 

조각에서의 동공 표현의 의미는 복선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임을 점차 실감하게 된다. 여태 추리 소설의 숨겨진 가능성에 많은 기대를 걸고 강력한 게 '나타나길' 기다려 왔다면, 드러난 증거들을 선별해서 사건의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발견하기' 작업이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본격의 미덕이 아닌가 한다.
 
슈퍼맨과 같은 초인적 탐정의 마력에 약간 진력이 났다면, 완벽한 범행에 걸맞는 해체력보다 (인터뷰어가 말했던)'복선을 관통하는 키워드-오해', 즉 인간사의 불편한 감정들을 수사하는 탐정을 만나고 싶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소설이다.

시튼 탐정 동물기/야나기 코지 지음, 박현미 옮김/루비박스


아마도 이 책은 '본격'이란 수식어는 달지 못했을 것이다. 사건의 해결사도 탐정이 아니거니와 독자는 모든 추리과정을 전적으로 전해들을 수 밖에 없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한다. 독서 당시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통해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책의 재미가 덜하진 않다. <시튼 탐정 동물기>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동물 탐정들이 능력을 과시하고 있으니까. 누구보다 야생동물들을 사랑하고 깊이 이해하는 어니스트 시튼은 실제 인물이기도 하며, 각각의 사건들은 모두 그의 저작에서 발굴한 사소한 단서들을 확대한 재기 넘치는 상상물이다.

숲 속의 자연주의적 삶에 매료된 시튼의 야생 경험담과 담백한 철학들이, 유쾌하게 해소될 크고 작은 사건들과 어우러져 손바닥 크기의 책만큼이나 아기자기한 매력을 준다. 동물들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탐정소설들을 간혹 보긴 했지만 동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만으로 완성되는 추리는 무척 독특하다. 

야생동물의 흔적으로 몸체를 상상하고 생태를 가늠하는 추리력이 탐정의 직감, 논리력과 얼마나 유사한지 <시튼 탐정 동물기>의 저자는 간파하고 있었으리라.

살인 광시곡 1/김주연 지음/아름다운사람들


2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1편밖엔 못봤단 얘기다. 신선하지만은 않은 거친 문장들과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장막이 되긴 했지만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만큼은 강렬하달밖에. 병적이고 음울한, 현실에선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극단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이면을 뒤집어 깐다.

그 뒤집어진 주머니에서 털리는 먼지 중의 하나가 아동 토막 살인이다. 빤지르르한 엘리트 계층의 용의자가 의아하게도 자신을 껴안아줄 줄 엄마를 찾는 듯, 법의학자를 불러세운 1편의 마지막 장은 기초적인 궁금증을 불러세운다. 그는 범인일까 아닐까.
 
1편의 시작과 끝은 '살인사건'에 대한 경과 보고이지만 나머지 두 인물들은 일단 그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2편에서는 그와의 연결점을 확연히 제시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천재와 거장 사이에서, 연주자와 작곡가 사이에서, 영감과 현실 사이에서 외롭고 괴로운 '서연'이란 인물이 <살인광시곡>의 배경음악이다. 새끼 손가락의 두 마디를 잃은 비애의 피아니스트 영애는 이 책의 작곡가 구실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의자로 지목되 불안한 감정들을 수시로 드러내야만 하는 안유상은 <살인광시곡>의 연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음악의 광기에 얽힌 살인악보다. 예술에 덧붙여진 수많은 수식어 중에 '아름답다'를 빼놓았을 때, 창작과 열정에 수반되는 고통과 희생 모멸감, 광적인 희열 등의 검은 그림자를 나열한다. 찬란해야만 할 재능의 힘이 역으로 치명적인 독(毒)처럼 재능의 몸통을 괴롭힌다.
 
음악적 구성이 될 지는 예의 지켜봐야겠지만 창작욕의 극단과 인간성의 극단이 만나 연주될 가파른 클라이막스가 기다려진다.                

   



인터파크 도서 우수리뷰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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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응애, 응애."
1995년 미국 메사츄세츠의 한 병원에서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습니다.
1분 차이로 태어난 두 아이의 이름은 카이리와 브리엘이었어요.



불행이도 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질 못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일곱 달 만에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동생 브리엘은 심장이 약하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 안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 브리엘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습니다.
온 몸이 파랗게 변한 브리엘은 계속해서 울었어요.
..어떤 치료도,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때 한 간호사가 입을 열었어요.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있게 하면 어떨까요? 태어나기 전 엄마의 뱃속에서처럼요."

...두 아이의 부모님은 간호사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카이리와 브리엘은 조심스럽게 한 인큐베이터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둘의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오른 쪽 사진출처(국민일보)

언니 카이리가 손을 뻗어 브리엘의 어깨를 감싸안은 것입니다.
카이리는 마치 포옹을 하듯 아픈 동생을 껴안았어요.
그렇게 두 아이는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꼭 붙어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언니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지 않아
놀랍게도 브리엘의 호흡과 맥박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마침내 브리엘은 편안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중략)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포옹>에서




알고보니 꽤나 유명세를 탄 자매 였습니다. 몇 년 전 sbs스페셜에서 다루어진 내용이기도 하고 표제가 방송의 제목과도 동일하더라구요. 하지만 미담에는 시큰둥한 엄마와 30개월의 아이에겐 금시초문이었지요. 지난 주 아이에게 이 책을 서른 번은 족히 읽어줬을 겁니다. '아기'라는 존재에게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고, 반복해서 자신과 비교해보며(모기 물린 자국을 가르키며, 나는 다 낳았는데.. 같은) '감동'이라기 보다는 '재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신체접촉의 힘에 대해서는 육아서들이 빼놓지 않는 부분이라, 엄마에겐 그닥 새로운 효험이랄건 없었지만 이어 등장하는 '5년째 하루 다섯 번 포옹을 실천하고 있는 은정이네 가족''15년 넘게 아이들을 안아 주고 계신 이선희 선생님'의 이야기는, 비록 드라마틱 하진 않지만 '포옹의 실천법'이 무척 살갑게 다가왔습니다. 

대게 아이들은 포옹의 약효같은 거 없이도 안는 걸 무엇보다 좋아합니다.(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역시 어떤 동화책들은 제 속의 아이를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하는 것 같습니다.
         

 

카이리와 브리엘 사진출처(세계일보),오른 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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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뭘 좀 읽어야, 200쪽은 읽어줘야 책 좀 읽었다,는 기분. '먹물만 차서는' 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말인가 봅니다. 골방에 앉아 문자를 해독할 때는 제법 똑똑해졌다는 으쓱함으로 대차게 방문을 열지만, 불한당인양 들이치는 햇볕에 미간이 구겨집니다. 웅크리려는 관성과 슬리퍼를 꿰고 마당으로 진입하려는 운동력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시간으로 치면 매우 짧지만 시공간의 상대운동으로서는 굉장한 한 발자국을 내밀고 있는 샘입니다. 마치 등 뒤로 골방의 지구가 밀려나는 것처럼요.
 
문자는 계속 읽게 하려는 성질을 가졌다고 가정해봅니다. 무거운 물주전자처럼 문자를 행동으로 옮기려면 상당한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또 독서자와 문자 간의 강렬한 화학적 결합이 스스로 외부힘으로 상정되기도 합니다. 책의 관성에 굴복하는 시간은 문자의 에너지를 깊히 체험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림은 어떨까요. 그림도 문자처럼 계속 바라보게 하려는 관성을 가졌을까요. 기막힌 풍광을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는 표현은 그림에도 충분히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떤 그림이나 풍경, 장면들은 수시로 머릿속을 들락거리며 멀지 않은 곳에 달라붙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 시각적 기억들은 생각의 지도에 어떤 표시로 존재할까요. 

강물처럼 멈추지 않거나 바다처럼 들고 나는 것이 문자라면 통째로 각인되길 원하는 그림은, 제 생각의 지도에 우뚝한 육지였습니다. 문자의 형상은 추상적이지만 그림의 형상은 구체적입니다. 그 육지의 안온함에 반해 그림을 곧잘 담아두곤 했습니다. 미술관에도 가고, 화첩도 사보고, 화가들의 책도 더러 읽고, 엽서도 모으고, 뭔가를 읽는 것만큼 보는 것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게다가 그림은 그닥 세상과 격리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제게 세상은 구경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림 외출은 관성과 싸울만큼 힘겹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그림을 봅니다. 그림이 그린 세상을 목격합니다. 글자는 세상을 많이 담으려고 주머니를 부풀리지만 그림은 네모의 인색함으로 넉넉합니다. 운동과 정지 사이에서 머무를 수 있다면 그건 표면적인 힘이 0이 되는 팽팽함 입니다.
 
엄마가 되어 '문화생활'이라 일컫는 그림구경은 거의 할 수 없었지만 그림책은 제게 무궁무진한 장면을 선사합니다. 여기 '그림책 화가'들이 있습니다. 엄마에게도 알량한 문화생활을 제공하는 그들에게 작은 감사를 전합니다. 

만희네 집/권윤덕/길벗어린이//꽃할머니/권윤덕/사계절/2010.6



그림책 작가 권윤덕을 만난 건 <만희네 집>이었습니다. 평범한 주택의 일상 세밀화 정도로 여겼던 그림들이 파노라마의 판형으로 길어진 시계를 확보합니다. 안보이는 게 없습니다. 십장생 자개장부터 서늘한 광에 매달린 조리나 키, 옥상 위로 낮아진 전봇대, 색색의 이불보까지, 눈은 평화롭고 싱싱해 집니다. 산수화와 공필화, 불화를 공부했다는 작가는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꽃할머니>에서) 만희를 따라 집안 곳곳을 살피면서 열린 방문 사이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먹빛으로 칠해지는데, 그건 다음 공간으로 이어지는 소박한 장치예요.





무엇보다 옅은 수묵담채화 풍의 사실적인 그림들이 숨길 수 없는 위트를 발휘하는 곳이, 이집트로부터 세잔, 피카소로 이어지는  입체(원근법의 입체감이 아닌)기법 이예요. 원근법도 사용하고 있지만, 같은 바닥에 놓인 장독들이 마치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보고 그린 것마냥 화가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아요. 모든 각도에서 본 것을 평면에 나열했을 때 세잔의 정물화는 위태롭고 피카소의 초상화들은 기괴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권윤덕 그림에서 느껴지는 푸근한 재미는 이 책의 주인공인 만희의 시선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인것 같아요. 만희가 바라보는 장독과 엄마가 뜨고 있는 장독 안의 장은 서로 다르니까요. 또 사선으로 기울어진 광은 마치 만희와 함께 엄마에게 비스듬히 기대 이야기를 듣는 모양처럼 정답습니다. 


차례로, 이집트 벽화, 위안소 조감도, 부분 확대 사진

이 기법이 한중일 공동 기획으로 나온 평화 그림책 1번 <꽃할머니>에서도 소중한 구실을 합니다. 위안소의 조감도를 담은 한 페이지는 이집트의 벽화처럼 나무가 옆으로 눕고 일본군들이 성냥개비처럼 위안소를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머리통이 보이는게 아니라) 화장실같이 다닥다닥 붙은 위안부들의 거처가 문앞에 줄을 선 일본군들을 전시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평면도에는 침대에 널부러진 위안부들과 벨트를 클러 바지를 내리는 수직의 일본군들과 대조적입니다. 

말하자면 기법에 담은 생각들이, 시각을 기억으로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 집 이야기/존 패트릭 루이스(글), 로베르토 인노첸티(그림)/사계절/2010.5




왼쪽이<그 집 이야기>, 오른 쪽이 피터르 브뤼헐의 <농가의 혼례>(그림 출처; 네이버 검색)


비슷한 소재의 집 그림 책인 <그 집 이야기> 역시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한 눈에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에서 만났던 피터르 브뤼헐의 농가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그 집'이 이 책의 주인공인건 확실치만 집을 채우는 인간들, 또한 이 책의 주인입니다. 집과 함께 집 주변의 대지와도 인연을 맺고 삶을 드러내는 인간들이, 백년 동안 동일한 프레임으로 포착됩니다. 이 부분은 피터르 브뤼헐이 재생했던 소박한 농가의 휴머니즘과 일맥상통 합니다. 백년 동안 인간들은 좀 더 단단해지려 땅을 일구고 혼례와 장례를 치르고, 전쟁을 겪고, 새로운 일가를 이룹니다.



그동안 '집'은 울타리, 피난처, 새로운 꿈이 되면서 인간들을 품습니다. <그 집 이야기>의 또 하나의 백미는 그림을 뒤따르는 짧은 시들 입니다.

한여름이 초록 옷 입고 들러리 설 때/언덕 집 아가씨는 앞날을 꿈꾸며/아랫마을 벽돌장이 청년의 손을 꼬옥 잡는다/혼례를 치르는 동안, 삶은 잠시 숨을 멎는다.    
                  
숨이 멎을만큼 정제되고 핵심적인 구절들이 마음을 뒤흔듭니다. 어쩌면 '집'이 사람과 어깨를 거는 순간 이 책은 '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으로 그린 시가 시구와 만나면서 무심한 프레임조차 명암을 바꾸며 화답합니다. 집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을 관람하면 대체 '시'란 어디서 나오는지 조금 알듯도 합니다.



파도야 놀자/이수지/비룡소//나무집/마리예 톨만, 로날트 톨만/여유당/2010.6


 
글씨없는 그림책은 이미 이수지의 <파도야 놀자>로 경험했습니다. 오로지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그림으로 눈맞추는 이런 책들은 아이에게나 저에게나 짧고 깊은 휴식을 줍니다. 낱자를 따라 가는 대신 그림의 물감이 마음에 번지도록 놔두면 그만입니다. 몇 번 보다 지루해지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물론 그림에 주석을 다는 정도로요. 말없이 볼 수 있다면 언제나 그 편을 택하고 싶지만요. 


<파도야 놀자>는 개구쟁이 소녀가 파도와 장난을 치는 연속 컷이예요. 붓 펜의 묵빛 부드러움이 푸른색 유화 물감빛 바다에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그 어느때보다 장난끼 넘칩니다. 역시 이 책도 <그 집 이야기>처럼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아이와 파도가 신경전을 벌입니다. 그러고보니 <나무집>도 같은 방식이군요. 말그대로 나무 위에 집이 한 채 있고, 그 곳에 흰 곰과 갈색곰이 차례로 도착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좋은 친구나 연인이 되었나 봅니다. 집에 머무르며 수많은 동료들을 맞이하고, 어울리고, 떠나보내는 과정 일체가 환상적 분위기로 포착됩니다.  

생명, 평화, 자연을 노래한다지만 글씨가 없으니 직설도 없습니다. 서로와 나무에 몸을 부비고,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들이 물처럼 계절처럼 흘러갈 따름입니다. 연필로 그린듯한 순도 낮은 파스텔화가 눈을 순하게 길들입니다. 그림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면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숨어 있습니다. 색감으로 먼저 보고 보물찾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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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책 자루2010/06/07 10:14

나는 개입니까? 나는 개입니다, 아니 나는 개보다 낫지 않습니다.

문학의 시작이 이곳에 있다는 것, 지난 주 실감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개에 대해 쓰고, 개가 되서 쓰고, 개의 눈으로 사람을 보겠습니까. 동물이 사람의 문학 속으로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면 전 별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것조차도 '인간'의 시선으로 말미암은 '상상력'이란 우수한 능력발휘 정도가 아닌가 했습니다. 비겁한 것도 같았습니다. 동물이 될라치면 마음껏 인간세를 조롱하고 평가하는 일이 더욱 당당해졌고, 보기 좋은 문학적 책략은 아닐지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개>와 <워낭>
아닌게 아니라 김훈의 <개>는 좀 그랬습니다. ebs 다큐 프라임의 <인간과 개>를 통해 만난 <개>를 펼친 건 방송이 거의 잊혀질 즈음이었습니다. 극진히 의인화된 개가 무차별적인 개발의 서글픔과 아이들의 발바닥에서 찾는 희망을 의례 단호한 어투로 전달합니다. 도리없이 교훈이 앞장서고 개와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사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심심하게 나열됩니다. '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라는 문학적 장치에 첫눈엔 탄식했을 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감상적으로 미화된 개의 말투는 그것이 개의 눈이 아님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웅변은 힘을 잃고 개에게도, 개가 응시하던 무지렁이들에게도 몰입할 수 없었죠. 이순원의 <워낭>은 같은 방식으로 '소가 바라보는 세상'을 전하면서도 소의 능력들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소 앞에서 인간도 역사도 유유히 흘러가면서 좀 더 자연스러운 '인간과 동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어니스트 톰슨 시튼의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과연 위험천만, 소설가 김훈의 작품에 흠이 있을거란 기대조차 했겠냐 싶습니다. <아름답고 슬픈~>은 '문학'은 아니지만,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문학보다 더 문학다운 기록입니다.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가 생물들의 기이한 습성을 다루거나, <동물의 왕국>이 먹이사슬의 광포함이나 개체에 대한 무한연정을 다루는데 하도 익숙해져서 '동물 이야기'라면 수순처럼 그런 영상이 떠오릅니다. 그곳엔 우리 삶의 가장 잔인한 법칙들과 드라마가 존재하고, 어쩌면 '그들'보다 내가 속한 '세상'를 발견하는데 더 혈안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주 작은 우월감조차 허락하지 않는 어니스트 톰슨의 야생동물 관찰 기록은 굳이 개가 되지 않고도, 개처럼 몸을 낮추지 않고도, 연출 없는 드라마를 지어내지 않고도 충분히 경이로왔습니다. 실은 이런 지독한 열정 앞에선 '문학이 의도하는 바'가 한없이 작아집니다. 게다가 그는 이야기 집을 짓는 솜씨도 여느 문장가에 못지 않습니다. 저자가 직접 그린 동물들의 연필화로 장식된 이 책이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물의 1번에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깝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실은 생면부지의 비극적인 야생동물들의 삶이 과연 무슨 재미가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시작한 독서는 단 몇 줄만으로 의심을 걷어내더니 단숨에 책을 덮고 입맛을 다시게 하고 말았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육하는 동물들을 농락하면서 몇 년간 카럼포의 무법자로 지능을 뽐낸 늑대왕 로보, 갓 낳은 새끼를 기르며 지혜를 뽐내는 솜꼬리 토끼의 예정된 비극, 늑대의 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야생동물의 최후를 맞이한 저자의 개 빙고, 죽음 앞에서도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삶. 전 누구보다 옛날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할 줄 아는 할아버지 앞에 앉은 듯 무릎을 조아리고 귀를 펼쳤습니다.

또 어떤 구절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러 눈을 감았습니다. 징그러울 정도로 육감이 발달한 늑대왕 로보를 잡기 위해 덫을 만들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는 갓 죽인 한 살짜리 암소의 콩팥 중 기름덩어리에다 치즈를 섞은 후 도자기 그릇에 담아 끓였다. 그러고는 치즈로 범벅이 된 고기를 식혀 몇 덩이로 자르면서 쇠붙이 냄새가 나지 않도록 일부러 뼈로만든 칼을 사용했다. 그 다음에는 스트리키네와 시안화물을 냄새가 나지 않도록 캡슐을 듬뿍 담은 후 입구를 치즈로 막았다. 나는 작업하는 내내 어린 암소의 뜨거운 피에 흠씬 적신 장갑을 끼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끼에 숨결이 닿는 것조차 피했다'


매서운 겨울, 적들로부터는 안전했지만 굶주림의 고통을 이겨야만 했던 빨간목깃털 메추라기가 맞이한 밤은 이토록 잔인했습니다.

이틀째 밤에는 더욱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북풍이 자신의 흰말 떼를 보냈다. 그 말들은 쉬익쉬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하얀 대지 위를 흰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했다.

 
메시지란 이야기가 아니라 숨결에 있다고 야생동물들이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문학이 이다지도 시시할 밖에요. 기록자이자 관찰자인 저자가 여는 글에서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구절이 책을 다시 응시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어떤 상식적인 생각, 즉 지난 세기에 도덕이라고 불려왔던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도덕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성서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성서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을 <시튼 탐정 동물기>라는 독특한 소설에서 찾아보기로 결정합니다. 왜냐면 저를 '자연주의자 톰슨 시튼'으로 이끈 주범이 바로 이 소설이었으니까요. 이 책은 굳이 분류하자면 탐정소설입니다.


자연주의자 시튼, 탐정 시튼
몇 겹의 액자 구성으로 재미를 배가 시키는 <시튼 탐정 동물기>는 무엇보다 실물을 주인공으로 허구의 살을 입혔다는 점이 진가로 느껴집니다. 더우기 그 실물은 탐정이 아닌 숲 속의 자연주의자였습니다. 애드가 앨런 포가 미스터리와 동물의 조합을 선보인 것처럼, 동물을 사건 해결의 열쇠로 내세우고 동물의 성향에 누구보다 해박한 어니스트 시튼이 뒤죽박죽이 된 사건을 꿰어가는 내용들입니다. 

이 일본 작가의 글쓰기조차 탐정의 추리방식이었다는 걸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로 확인합니다. 어린 시절 형이 선물받은 세계명작 전집을 새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물려 받아 <시튼 동물기>를 읽었던 저자가 아주 사소한 단서들-그것이 한줄 뿐이래도-을 단초로 이야기를 꾸며낸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 어니스트 시튼의 목소리로 재생됩니다. 마치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처럼요. 

시튼이 동물자신보다 동물을 더 사랑한것처럼, <시튼 탐정 동물기>의 작가 역시 시튼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튼의 자서전을 포함해 많은 저작들을 읽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단서들이 이 소설의 독특한 탐정을 만들어냈음을 알게 될까요. 결국 탐정과 동물학자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발자국으로 동물의 크기나 종을 가늠하고 지난한 관찰을 통해 동물의 울음소리를 감별해내는 능력이 탐정의 이성적 추리력이나 육감과 일맥상통한다는 건, 시튼 뒤에 붙은 '탐정'이란 말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를 말해줍니다. 실제로 시튼의 입에서 셜록 홈즈의 기술이 몇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까마귀의 울음 소리를 악보로 만든 시튼. 그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소설. (왼쪽이 <시튼 탐정 동물기> 오른쪽이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카람포의 악마는 '늑대왕 로보의 전설'에서, 실버스팟은 우표수집처럼 반짝이는 작은 물건들을 모으길 좋아하던 '세상에 둘도 없는 까마귀'에서, 외양간 밀실과 메기 조는 형이 소의 젖을 짜기 위해 꼬리에 벽돌을 달아놓았다는 어니스트 시튼의 몇 줄의 경험담에서 시작됩니다. 작가의 상상력은 이야기 짓기에서 멈추지 않고, 어니스트 시튼의 자연주의적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보탭니다. 이를테면 숲 속에서 종종 총을 든 사냥꾼들과 마주치면 어니스트 시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현명해지기 위해 숲에 온 겁니다. 동물들에게서 숲에 대한 멋 진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요."

또 영특한 다람쥐 배너가 해결한 사건 뒤에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이런말을 전합니다.

"..이 미국에서 열매를 맺는 숲 속 나무는 사실상 모두 회색다람쥐나 그 동료들 덕분에 자라난 거랍니다. 그들은 나무 열매를 땅속에 모아둡니다. 그중 95퍼센트는 자기 것이지만 나머지 5퍼센트의 나무열매는 먹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데 그 열매가 싹을 틔워 이윽고 숲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 자그마한 다람쥐들이 이 광대한 미국의 모든 숲은 만든다고 하니 그런 통쾌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만든 숲을 루즈벨트(전 미국 대통령)와 함께 걸을 때, 어니스트 시튼은 이런 단상을 남깁니다.

'숲길을 산책하는 사람은 모두 걷기 시작해서 한걸음씩 뗄 때마다 다양한 자연과 동물을 만나게 됩니다.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길을 산책하다보면 실제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후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 씨가 종종 군사력을 동원해 일반인들에게 곤봉정책이라고 불리는 매우 강경한 외교정책을 추진한 것은 당신도 잘 아실테지요. 나는 어떤 전쟁이든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일으키는 전쟁이야말로 최대의 자연파괴 행위이고 야생 동물들의 생명과 살아갈 장소를 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루즈벨트 씨가 정책으로 삼은 자연보호란 우선은 인간이, 특히 미국 국민이, 굳이 말하자면 백인 사회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틈틈히 이어지는 어니스트 시튼의 깊은 목소리는 <시튼 탐정 동물기>가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재미거리로만 동물을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까마귀의 울음 소리를 음계로 그려서 그들의 의사소통법에 대해 말하는 시튼의 모습은 '성서 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이, -제식대로 말하면- 인간은 자연의 관찰자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나 동물을 소유할 수도, 더구나 마음대로 죽일 권리도, 파헤칠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는 것. 을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 세심한 동물 기록도, 동물들이 인간의 욕망을 폭로하듯 사건의 실마리를 내주는 것도, 그의 관찰력을 뽐내거나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야생동물 나름대로의 완벽한 삶의 방식을 들려주는데 몰두하는 것입니다. 눈요기에 좋은 글거리가 아닌, 끝끝내 숨어 존재하는 위대한 구도자들의 삶을 파헤치는 한 도덕가의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숲의 외딴 길에서 곰을 만났을 때 저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안녕, 곰 아저씨"


*못다한 이야기

더불어 지난 주에 함께 읽었던 두 권의 동물 관련 책에 대해서도 슬쩍 말해볼까 합니다.

더보기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푸른숲주니어
시튼 탐정 동물기
야나기 코지 지음, 박현미 옮김/루비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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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책 자루2010/05/31 07:51
어디부터 시작할까. 이번 주 따끈한 신간을 모두 잡아먹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부터 시작해야할까. 아니면 '머릿 속에 달랑 삽 한자루'(진중권) 들어있는 정권의 수장이 후퇴시킨 민주주의를 먼저 불러볼까. 그것도 아니면 민주정권이라고 믿어마지 않은 지난 10년간의 두 대통령이 실은 노동자와 불편한 관계였다는 비판부터 해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 막 노동자들의 절규에 귀를 연 내 미천함부터 폭로해야할까.

분명한 건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가 뭐라도 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논객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말할 땐 이건 분명히 고매한 민주주의, 이념의 우리 속에 갖힌 민주주의, 의당 그래야만 하는 민주주의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말하자면 역사속의 민주주의 재조명으로 불을 붙이겠다는 '객'들의 '논'일 뿐, 나(主)의 고민(惱)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시' 민주주의다. 민주공화국의 고객이 외치는 민주주의 리콜에 사주는 왜 변함없이 돈얘기만 꺼내는가. 그럼 그는 고객의 입을 막을만한 별다른 재주라도 있는가. 이 아줌마에게도 모종삽 한자루 쥐어주고 도시 미관에 애쓴 공로로 급여봉투라도 나눠주겠는가. 민주주의가 밥은 못먹여 주었기 때문에 CEO 대통령이라는 희한한 직함으로 탄생한 그는 딱, 노동자를 탄압한 자본의 횡포대로, 딱 재벌총수만큼의 위력으로 국민을 머슴삼아 휘두르고 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로 노동운동의 메뉴얼을 만든 골리앗전사 이갑용에 의하면 짐승처럼 일했던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처우개선보다 두발자유화를 가장 강력히 원했다. 개인의 존엄성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경제 강국도, 공평 무사도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특별히 싸우길 좋아하는 투쟁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며 남편이며 동료다. 그들의 민주적 권리찾기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실제로 한홍구 교수(<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끝나자마자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들며 민주화가 돼서 살림살이가 좋아졌다고 주장한다. 그 석 달 동안 일어난 3000여 건의 파업은 임금을 인상시켰고, 내수 시장을 원활하게했고, 구매력을 높이고, 나아가 평균수명까지도 늘렸다고 말이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역시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어떻게 분배의 정의를 이뤄냈고, 사회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말한다.  

작업 환경이나 근로조건을 향상시키려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경제 파탄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덧씌우는, 자본의 노동자 길들이기(<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노동 탄압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역치로 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노동 운동을 그들만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경제 대통령을 자칭하면서 언론과 공권력을 이용해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삼키는 것이 국가의 사익에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이라면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이 원했던 '두발 자유화'를 떠올려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냐,고 묻는 사람들은 그래도 낳다. 이리저리 계산해보고 밥 안먹여준다는 선택을 한 것이니, 민주주의가 만날 올라오는 밥상의 밥그릇에 남은 밥떼기처럼 당연했던 80년생 나의 삶은, 부끄럽게도, 단 한번도 민주주의를 목놓아 부른적이 없다. 선거권이 주어지고 나의 첫 대통령이 김대중, 다음이 노무현 이었으니 설사 그들이 '좌측 깜빡이를 켠 우회전'(<리얼진보>)이라해도 분명 나의 20대 민주주의는 반공만큼도 거론되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는'시점에 곧장 도달할 수 있는 질문 '나는 지금 투표말고 뭘 할 수 있을까'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전혀 민주적이지 못했던 지난 몇 개월간의 독서에 성토하면 이번 주 닥치는 대로 책을 펼쳤다. <소수의견><이웃집 김형탁><길은 복잡하지 않다>. 무슨 냄새가 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 <소수의견>의 껍데기를 벗기면 책은 붉은 색을 드러낸다. 두 건의 살인을 소재로 하고 있는 만큼 주택가에 번진 핏물을 연상하는게 적당하겠지만, 투쟁하는 철거민 아들의 죽음이 경찰병력에 의해서냐 철거용역업체의 깡패에 의해서냐 하는 법정싸움이라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붉은 색 딱지를 붙인건 민주화 열사들이 탄생한 학생운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니 어쩌면 분단 이후 반공교육부터 이념 정치공세가 먹히는 여태의 현재 진행형으로도 말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현실은 이데올로기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효과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인하는 것이다. (루이 알튀세,<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정치>, <소수의견>에서 재인용)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도정일,박원순 외/휴머니스트/2010.5
소수의견/손아람/들녁/2010.4 


소수의견

<소수의견>은 잘게 나뉜 '공소시효''사실관계''재정신청'등의 소제목과 함께 각종 법관련 도서의 인용문으로 시작된다. 허공에 글씨를 쓰는 것만큼 허무한 일인 '이데올로기' 덧씌우기가 어떤 효력이 있는지 읽어낼 수 있다. 이 붉은 색 딱지는 진짜 붉은 사람에게 붙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대뜸 시작되는게 이 색깔판명이다. 말하자면 사익으로만 똘똘뭉친 집단은 언제든 이데올로기 공세를 정당화할 준비가 되어있다. 민생살림의 사무국장도 그들을 위해 싸워 준 변호사를 내치며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지난10년간 관료주의에 맞서 싸워왔죠. 하지만 인정하겠습니다. 그게 우리 안의 관료주의를 극복했다는 뜻은 결코 아닌 걸 저도 압니다. ..    

소설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간 민주 노총에 대해 솔직히 비판한다. 

불온서적들의 계보라도 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같은 필독서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용산참사'를 오버랩 시킬 수밖에 없는 <소수의견>이 사회적 문제를 대두시킨 문학사의 흐름속에서 짚어볼 수 있겠지만 짐작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런게 아니라도 <소수의견>은 한눈에 딱딱한 제목과 '사건은 대한민국 법률 빛 학설과 판례를 따른다'로 문을 열면서 '재밌게' 읽으리란 기대는 접어둬야했다. 하지만 거창하고 과잉된 법문들을 뒤로 법정 드라마의 말초적인 재미라는 의외의 소득을 준다. 

<사랑과 전쟁>이나 <죄와 벌>같은 법정 드라마의 공방은 유무죄의 법정의 정의보다 증거와 증인, 정황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법정 자체가 소설의 모티브, 행간, 구조들을 닮아서 재밌다. 이해의 한계력을 가지고 완성된 소설 한권을 쓰는 법정은 익숙하다. 결국 이 소설을 붙잡고 한 번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사건이나 주제의 무게와는 별개로 이 소설은 지나치게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완벽한 허구이지만 우리의 공동기억은 <소수의견>을 지난 용산 참사와 당연한 듯 오버랩시킨다. 절대 용산은 아니지만 모두 한국의 용산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니 그런 혐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소설이다. 소수의견, 소수자에 대한 물음도 승리도 과정도 모두 극적인 장치에 불과할 지 모르겠지만 교묘하게 현실과 겹칠 때 소수자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분노하게 되고, 승리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낸다. 

그 주역은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인권과 법을 저울질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열혈 변호사의 행보는 아니었다. 어쩌면 우연히, 그리고 자신의 이익과도 결부하여 만족스러운 해피엔딩을 이끌어낸 영광스런 주인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선택은 언제든 옳다는 일차적인 해석을 내릴 수도 있지만, 주인공이 지도를 읽고 목적지를 향해가는 똘똘한 항해사라기보다는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여행자였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한 발자국'이 만들어낸 행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 할 때는 생각하지 마라'고 했던 데카르트의 말이 떠오른다.


이웃집 김형탁/인터뷰, 엮음 서미현/레디앙/2010.2
길은 복잡하지 않다/이갑용/철수와영희/2009.12


연이어 만난 두 명 의 진짜 행동가들은 이웃집 김형탁과 골리앗전사 이용갑이다. 노동운동으로 다진 그들의 뚝심은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간다.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노조위원장, 지역활동가로 꿈을 뿌리내린 김형탁은 이웃집에 있고, 노동자 이용갑은 전사라는 칭호답게 노조위원장, 민주노총위원장, 지방단체자치장으로 노동자의 꿈이라는 나무에 꽃을 틔운다.


이웃집 김형탁


노동운동가를 이웃집에 둔 또다른 이웃이 인터뷰하고 엮은 <이웃집 김형탁>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지역운동, 생태운동 등의 이력을 담백하게 맛볼 수 있다. 

<다시, 민주주의다>의 한 명의 논객 김찬호는 '마을'을 말한다. 삶의 결이 느껴지는, 서로의 삶을 해석해주는 '의미 창조의 공간'으로 마을을 드는 것이다. 그가 민주주의와 직접 결부하여 말하진 않았지만 대의민주주의의 부작용으로 접속이 끊어진 자리에 골목길을 이어붙이고 빨래터같은 거점 공간을 만든다면? 
   
근래, 마을에 토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 가장 작은 공동체이면서 큰 목소리가 될수도 있는 '마을'에 대해 되뇌는 중이었다. 투표권을 행사하고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고독한 삶으로 돌아와 세상 돌아가기를 방관하고 보니, CEO 대통령, 녹색 성장이란 웃지 못할 신생 단어조합을 들어야했다. 반대한다면 견제하거나, 소통을 원한다면 손 내밀 수 있는 곳이 나의 이웃, 즉 동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향한다. 어느 정의로운 활동가의 삶이 그저그런 동네에 머물렀을 때, 노동 전사 이갑용이 구청장이 되었을 때보다 반가웠다. 

김형탁의 공이 실은, 책으로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 민주적 노선을 훑기에도 결과는 썩 내세울만한 것이 못되고, 개인적 이력 역시 익히 들어왔던 영웅의 면모에서도 모자란다. 친구들이 써서 보낸 편지에도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구색맞지 않은 내용들에 의아했으며, 절절한 구절도 도드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을의 서로 돌봄을 말하는 김찬호가 '나를 안전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내가 온전히 용납되는 공동체'로 든 마을이 이 책을 빛나게 한다.

시리즈로도 충분한 자질을 보이는 이웃집OOO가 민주주의의 거창한 구호를 우리 삶 속에 끌어들이는데 좋은 역할을 하였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다. 위인이나 열사를 모델로 정신을 다독이는 일은 한계가 있고 전혀 민주적인 발상도 아니다. 우선 나에게 묻는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열사가 될 수 있는가? 차라리 한 명의 열사가 되기보다 스무 명의 공공의 목소리가 되길 바란다. '이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고, 만나서 즐겁게 인사하는 이웃들이 속안에 무슨 생각과 꾀를 감추고 사는지 궁금했다'는 엮은 이는 심지어 '이웃집 한나라당, 이웃집 자유총연맹' 같은 토착적인 인터뷰를 해보고 싶은 바램을 이야기 한다. 

장엄한 공로자가 들려주는 구호와 결의에 찬 발언들보다, 노동의 현장에서 땀흘리고 약자의 대변자였던 이가 동네 이웃에게 학생운동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민주주의의 작은 꽃씨가 어떻게 번지고 지역 곳곳에 꽃밭이 되어가는지, 그 작은 소란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도 들을 수 있고, 흥국생명시절의 노조위원장으로서의 과장되지 않은 공들도 읽을 수 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소문만을 무성히 듣고 직접 그 속내를 살핀것은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런 역사를 역사시간에만 배우는 일은 얼마나 힘빠지는가. 그는 자기자리에서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어쓰고 있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

골리앗. 거인 최홍만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만 알고, 부끄럽게도 노동자의 투쟁에 사용된 전술이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고립된 장소의 고공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노동 운동에도 전혀 감흥이없던 일이 부끄러워진다. 그럼 나는 왜 노동자들의 권리에 이토록 무덤덤 했었는가. 답은 노동자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누린 권리는 일하는 것, 그리고 그만 두는 것, 둘 중 하나였다. 싸울 수 있는 권리를 나는 체득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 누구도, 심지어 나조차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책임한 삶을 살아왔다. 그의 싸움은 그가 더 많은 책임감을 짊어졌다는 걸 의미하기에 내가 버려둔 짐을 보는양 부끄럽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현대중공업의 뼛심 굵은 한 노동자가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시작한 노동자 투쟁의 기록으로 실명을 들었다 놨다 하며 힘있는 웅변을 들려준다. 그 싸움, 혹은 패배, 혹은 작은 승리의 기록은, 파업에 눈쌀을 찌푸리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목메는 노조란 어긋난 덮개를 벗기기에 충분했다.  

그 유명한 투쟁인 골리앗에서의 투쟁을 포함해 수많은 전투?를 읽어 가면서 자본이 노동자를 어떻게 길들여 왔는지를 감상한다. 일종의 노동 운동 교본으로 쓰여도 될만한 이야기들이 주석을 달고 이어진다. 노동자를 회유하고 압박하는 사측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는 폭로만으로도 가능했다. '그때는 이랬더라면'으로 운을 떼는 구절들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면서 노동 운동이 가야할 길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지금껏 조명되지 못했던 노동운동의 민주화 기여도를 설득하고, 자본과 언론, 정치가 합세해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가두는 현장을 공개하고, 공평하게도 노동운동의 변절자들과 함께 민주노총의 썩은 부위를 들여다보며 노동운동을 메뉴얼화한다. 또한 대화와 타협 같은 민주절차의 사탕발림이 노동자들과 어떻게 부딪히는 지를 감지하면서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을 탐색하게 만드는 것도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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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책 자루2010/05/22 15:44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표지다.
 
피곳씨와 두 아들은 피곳부인의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 게다가 피곳부인은 일하는 엄마. 학교와 회사에서 돌아온 부자는 "어이, 아줌마, 빨리 밥줘." 라고 저녁마다 외친다. 피곳 부인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 이들 부자는 티비 앞에 앉아 발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너희들은 돼지야.' 라고 쓰인 쪽지만 남기고 피곳부인은 사라져 버린다. 피곳부인의 경멸에 찬 예언이 피곳씨와 두 아들을 돼지로 만들고, 그들은 정말 끔찍하고 더러운 돼지 같은 생활을 한다. 먹을게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마침 나타난 피곳부인에게 부자는 "제발 돌아와 주세요."라는 굴욕적인 애원과 함께 집안일을 나누어 하기 시작한다. 피곳씨와 두 아들은 요리가 재밌어졌고, 피곳부인은 행복해졌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들에게 <돼지책>은 의미있는 아부다. '엄마는 차를 수리했습니다'로 끝맺으면서 과격할만치 여성의 편에 선다. 아이들의 동화책에서 성적 불평등의 영역은 진보적으로 탈바꿈했다. 앤서니 브라운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엄마의 모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나보다. 그래서 잔혹한 우화의 희생양이자 승리자로 여자를 그려낸다. 하지만 '엄마 일을 돕지 않으면 돼지가 될거야''엄마는 늘 힘들단다''아빠는 회사에서 돌아와 TV만 보지' 같은 메시지들은 어딘가 낯이 뜨거워지는 데가 있었다. (여성의 고정된 성역할 만큼이나) 



남편과 아이들이 집안 일을 돕는다면 '차를 수리할 수 있는' 기호에 맞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공평함이 굳이 헤롭다고 할 수도 없거니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한 가지 문제는 동화책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쓸모없고 게으른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동문학을 근대화하기 위한 가장 큰 노력은 여성들과 소녀들에게 촛점이 맞춰져왔다. ..이 책들은 여성 등장인물을 부엌과 아이 방에서 끌어내어 그들에게 전문적인 직업과 책임을 부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심지어 용어도 변화했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이제 젠더 중립적인 방식으로 우편배달부mail carrier(postman이 아니다)또는 소방관firefighter(fireman이 아니다)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동일한 정형화된 노선을 따라 계속애서 묘사 되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아버지들이다. -<나쁜 아빠>에서 

권위적이거나 자녀를 돌보지 않거나 애정이 없거나 혹은 부재하는 아버지의 부적절함을 암시하는 동화책들이 적극적인 아버지 역할 모델을 담고 있는 책을 압도한다는 연구결과는 충격적이다. 누군가 '동화책은 현실을 과장해서 담는 법 아니겠어?'라고 반문한다면 <나쁜 아빠>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는 미국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과 싸우는 120만 명의 사람들 중 단지 2%만이 여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어에서 '파이어맨'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모든 양육하는 부모의 2%를 훨씬 넘는 사람들이 남성들이며, 실제 수치로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양육하는 다정한 아버지들이 여성 소방관들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 -<나쁜 아빠>에서

차별과 억압의 시간을 만회하려는 몸짓이겠지만 그것이 '역차별'의 형태로 재현되고 '나쁜 아빠' 신화를 확산하고 있다는 통계는 개운하지 못했다. 아빠들의 수난사 속에서 더없이 귀중한 책인 <나쁜 아빠:신화와 장벽>은 가정에서의 아빠의 퇴장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강력한 주문으로, 어버지 육아의 무능력을 조장하는 원인들을 파헤치고, 아버지의 강점들을 재조명 한다.

더불어 나는 근래 쏟아진 '아빠 육아서'들을 돌아보기로 작정한다.


 
<아빠 100배 즐기기>

문화 평론가이자 자녀 교육 전문가인 김지룡씨도 같은 걸 느낀다. '우리 사회의 아빠들 대다수는 아빠로 살아가는 즐거움은 느끼지 못하고 책임감에만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빠나 아버지를 주제로 쓴 책이나 영화를 보면 하나같이 어둡고 우울하다. 아빠로 사는 것이 무슨 형벌을 감내해야 하는 것처럼 책임감만 운운한다. 나는 아빠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하고 싶다.' 

사회나 역사가 떠안긴 아빠를 향한 요구들이 아빠를 무기력하고 사랑받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자각한다. <아빠 100배 즐기기>가 출장길, 20년만에 보는 제주 밤바다보다 매일 보는 아이들 얼굴이 더 보고 싶은 경지까지 아빠들을 설득하고 끌어올릴 수 있을까. 솔직히 무리한 요구 같았다. 그저 주말 반나절 만이라도 아이와 온전한 시간을 갖길 바라는 것이 내 가장 소박한 바램이었다. 

요행히도 이 책의 설득법은 아빠맞춤이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좀 도와줘'보다 '청소기로 과자부스러기 좀 치워줄래?'같은 구체적인 어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왔다. 이 책은 '아이들과 부인을 사랑하라'가 아닌 직장이나 군대 생활에서의 관계의 도식을 가정에 대입함으로써 자발적인 행동지침들을 도출한다. 

이 방식은 이해하기도 쉽지만, 사회적인 능력을 가정에서 발휘하지 못했던 '나쁜 아빠'를 고무시킬만했다. 덧붙여 적지 않은 육아서들을 읽어내며 부모의 역할을 채비하는 엄마들이 자신있게 남편에게 권할 수 있는 육아서이자 아빠 자기계발서로 읽힐 수 있다. 사회적 성공 못지 않게 가정에서 사랑받는 아빠의 행복을 당당히 말한다.

육아서를 통해 흔해빠지게 들어왔던 육아의 기술들이 평범한 아빠의 목소리로 재생될 때도 의미있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육아서의 고전이 된 푸름이 아빠 최희수의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는 아빠들의 가랭이를 찢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 육아서가 '유아의 이해'나 엄마의 행동방식에 국한되는 경우가 흔한데 <아빠 100배 즐기기>는 아빠만이 해줄 수 있는 독특한 충고들로 가득하다. 동화책 뿐 아니라 육아서에서도 아빠는 밀려나 있었다. 저자의 폭넓은 경험들과 통합된 시선은 행복한 아빠 가 되기 위한 감 잡기를 돕는다.     


<엄마가 모르는 아빠효과>

이 책의 부제가 '대한민국 엄마들을 위한 완전육아 지침서'라는데는 조금 언짢다. '아빠효과' 조차도 육아의 주도자로 엄마를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든다. 아빠효과는 무엇보다 아빠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의 재능을 믿고 육아의 자리를 선뜻 내어 주어야 한다. 

<나쁜 아빠>의 저자 로스 D.파크의 저작들을 비롯해 이 책은 수많은 인용으로 '아빠효과'를 증명한다. 실은 아이의 성장 발달에 미치는 아빠의 고유한 영향력을 '아빠 효과 Father Effect'로 명명한 것이 로스 D.파크다. 이는 <엄마가 모르는 아빠효과>가 별로 독창적이지는 못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아빠의 능력을 충실하게 보여줄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자녀의 성장발달에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는 아빠효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빠는 엄마보다 신체적인 자극을 많이 줌으로써 엄마와 이루어지는 언어에 의한 정적인 상호작용을 보완해준다.
아이와 대화하거나 훈육할 때 좀 더 객관적인 아빠는 사회성과 논리적인 사고를 기르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엄마보다도 아빠에게 인정 받고 싶어한다. 
(로스 D.파크에 의하면) 아직 아빠가 안 된 남자 대학생도 자식이 없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울음들을 구별할 수 있다. 
아기를 목욕시키는 데는 아빠가 더 적합하다.
아빠와의 스킨십은 아기가 성장하면서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등등 (책에서 정리)

이 책이 아빠효과에 주목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완전육아'라는 부제에 따라 신생아부터 5~6세 아이들의 육아 방침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육아에 적극적인 유형의 아빠들이 참고할만하다.   


<아빠, 엄마 반만큼만 해라>


12년간 외조부 밑에서 자란 머리 큰 아들과 동거를 시작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책은 사춘기가 되어서야 아들과 함께 살 수 있었던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다. 불량아빠의 <아들 키우기> 15계명이 본문 사이에 격식을 갖추고 끼어들긴 하지만 다분히 경험에 의존한 해법에 가깝다. 

1. 아이가 싸웠다면 사실관계를 냉적이 따져라.
5. 강건하게 키우려면 스포츠를 가르쳐라.
7. 아들 성적관리, 아내에게 절대복종하라.
10. 아들을 아빠의 팬으로 만들어라.
13. 휴대폰 중독, Dr.이라부를 소개하라.(Dr.이라부는 오쿠다 히데오의 <인터풀>에 나오는 괴짜 정신과 의사다)

폭넒은 적용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비전문적 견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은근한 자식자랑과 분명한 남 얘기에 얼마나 귀기울일 수 있을까. 블로거들의 자세를 상기시켜본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들이 일상의 환기제가 되고 사고의 기폭제가 되는, 블로깅의 즐거움이 요새 독서 시장을 적잖히 장악하고 있다. 아마추어가 전문가와 대중을 네트워킹 한다. 작가의 재능 못지않는 인디라이터들이 글밭을 일구고 있다. 예전 같으면 모르겠지만 이런 책들에 한참 너그러워졌다. 

전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이 아빠가 할 수 있었던 아들키우기의 소스들을 돌아본다.

사춘기 아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에 대응하는 부모의 자세를 보고 가치의 기준을 세운다.
어릴적 자신을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와 주위 어른들이 들인 고생과 수고는 아이에게 자주 되새김질 해줄 필요가 있다. 
촌스러운 우정이 아들의 지친 등을 떠밀어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이를 질책할 때는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시간은 짧을 수록 좋다. ..일단 시작하면 아이가 눈물을 쏙 뺄만큼 혼을 낸다. 그리고는 적당히 감정을 어루만져준 다음, 마지막에 협박성 멘트 한마디를 잊지 않고 날려준다. 

 
 
자식 키우기에 적극적인 아빠들을 만나고 나니, 마음 어딘가가 한결 든든해진다. 변화를 시도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바뀌길 바라는 염원만으로도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는데에 희망을 건다. 또 한 권 문뜩 떠오르는 책이 있다. 역차별의 형태가 노골적인 <돼지책>이 못내 마음에 걸렸나보다.

<쾅! 지구에서 7만광년>에는 실업자 아버지와 유능한 직장여성 어머니를 둔 주인공이 나온다. 이 부부에게는 아이들이 겪는 모험담 만큼이나 큰 변화가 일어난다. 실업으로 인해 무능하고 의기소침해보였던 아빠는 차츰 뒤바뀐 성역할을 받아들이고, 결국엔 그 변화의 과정들이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실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털썩성의 외계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희생되지 않았던 유쾌한 판타지라고만 여겼지만 <나쁜 아빠:신화와 장벽>은 이 책을 좀 더 의미있게 되새김질 해준다.    




알라딘 서재 5월 3주 마이페이퍼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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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
책 자루2010/05/19 09:20
대안학교 1세대. 그들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대안학교의 자유로운 운영방식이나 인성교육, 과외활동, 입시문제 등등을 <이우학교>를 통해 슬쩍 엿봤다. 하지만 대안교육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협안에 적잖은 환상이 자리할 것이라는 일말의 의심을 어떤 형태로든 풀고 싶었다. 

방송이나 언론이 '천재'라는 이슈로 미래에 대한 커튼을 칠 때, <영재부모 오답백과>는 천재의 불운한 성장을 추적했고, 교과서와 백과사전이 입을 맞추어 위대한 대고구려의 군주-장수태왕의 화려한 역사 이력만을 편집했을 때 <한국사 인물통찰>은 중국을 향한 조공과 사대의 진실을 기술했다.  

뭐가 진실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언제든 격파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무심결에 '대안교육'을 꿈꿔왔고, 내가 그 대안의 수혜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늦지 않았다, 내 아이가 있다, 돈은 좀 들까, 등급이나 경쟁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기가 되겠지, 입시지옥으로 인한 공부과열에서 탈출했으니 일반 고교보다는 힘들지 않겠지, 같은 근거없는 추측이 난무했다. 

대안학교 역사 10년. 1세대 졸업생 15명의 현재가 <나? 대안학교 졸업생이야!>로 묶였다. 아직 특정사례에 한정되는 결과물들이 우세할만한 시기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고 사회로 진출한 일반코스의 고교생들과 비교해 보기에는 손색이 없다. 특별한 듯 평범한 듯 엇갈리고 다시 만나는 청춘들의 지점이 감질나는 맛보기를 해준다.

대안학교를 향한 편견과 실제
 
'대한학교?''문제아들''똥통학교''귀족교육''공부 안시키는 학교'가 그들이 종종 겪어야했던 대안학교에 대한 편견이었으니,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생한 기록이다. 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사뭇 진지해서, 취업난과 영어실력 늘리기에 고심중인 요즘 청춘의 상징들이 단박에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 사이의 삶의 질의 차이를 자로 재는 건 별로 유쾌하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일이지만, 보다 가시적인 차이점은 그들이 했던 고민과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그들은 이미 학교 입학 때부터 '자유'와 '자율'에 대해 고심했으며, 노동의 기쁨과 노고를 체험했고, 자신의 꿈을 시험해볼 수 있는 무대를 찾아나서거나 협력받았고, 선생님들에게 '공부'뿐만이 아닌 사랑과 존경을 배웠다. 그들 개개의 자질은 중점이 아니다. 거대한 삶 혹은 사회에서 격리된 듯한 일반의 교육현장에서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잡념들이 중심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선뜻 놀라웠다. 

수업거부를 하며, 별을 보며, 하고 싶은 동아리 활동을 하며, 스스로 축제를 준비하면서, 마음껏 방황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고, 엘리트보다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행복하게 선택할 수 있었고,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 정을 때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다시 학교를 찾아갈 마음이 생긴다는 건 두말할것 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 선택에 따르는 희생은 별로 달지 못하다. 뒤쳐진 공부를 몰아서, 죽어라 해야했으며, 대학교에서의 강의나 규율에도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기가 부지기수 인데다, '사회적 성공'이라는 잣대로 쟀을 때 함량미달 축인 졸업생들이 절반이었다. 물론 그들의 가능성에 대해선 긍정적이지만 전체적인 성적표가 썩 좋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대안학교'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나 편견에 적당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대안학교의 입시

대안학교의 인성교육이 얼마나 참된지 알고 있는 부모라해도 포기할 수 없는 걱정거리 중 하나가 '입시 교육' 일 것이다. 대안학교가 입시에는 분명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몇몇의 졸업생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스스로 세운 목표가 책임감을 만들었고 결국 '자기 주도적 공부'로 이끌었다고. 

<공부갈증-실컷 논 아이가 명문대 간다>는 '결국 공부는 혼자 하는 거야'란 통설을 넘어 부모가 사교육이나 입시에 매달리지 않는 길이 '명문대'가는 길이라는 역설적 이론을 내놓는다. 일반 인문계고의 선생님으로서 학생들과 자기 아이들에게 '놀게 해서 공부한다'는 철칙을 세우고 지켜나간 경험들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결과나 심리적 접근 같은 객관적인 증명이 부족하긴 하지만 충분히 납득은 갔다. 말하자면 결핍이 낳는 욕구를 공부법에 대입한 샘인데, 이는 대안학교에서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아이들의 학습법과 거의 유사하다. 게다가 이 아이들의 부모에겐 현재 자신의 상태를 요구없이 받아들여주고 아이와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부모가 있었다. 

옆집언니                                      

사교육, 입시전쟁을 향한 비판의 칼날은 무뎌진지 오래다. 어짜피 다섯 살 아이에게 책읽기 과외와 학습지를 겸하는 옆집 언니를 비난하는 일밖엔 안된다. 옆집 언니의 심성은 얼마나 고운가. 박스로 과일이나 고구마를 사면 푸짐하게 나눠주고, 텃밭의 몇 포기 안되는 배추를 쑥쑥 뽑아준다. 어떻게 옆집 언니를 비판의 칼날 위에 올릴 수 있겠는가. 또 그녀는 얼마나 교육적인가. (사사로운 감정이 아얘 없다고는 말 못한다)

비판할 건 생각과는 다른 부모의 행동이며 그렇지 못해 부끄러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행동'에 옮기고자 마음먹는다. 아이를 (방치가 아닌)방목할 것이고, 충분한 놀이과 적절한 결핍으로 갈증을 선사할 것이고, 아이가 원치 않는 한 선행학습이나 사교육을 시키지 않을 것이며, 아이가 현 교육방침에 부당함을 느낀다면 대안학교도 고려할 것이다. 

책읽는 엄마, 노력하는 부모, 사과하는 어른, 틀리면 고치는 용기,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 비난이나 비판없는 가정은 아이에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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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필 한다스